[씨네존/아메리칸 드림]'약속의 땅' 미국은 존재하지 않는다

  • 입력 2000년 6월 22일 11시 05분


막 고등학교의 문을 나선 젊은이들. "대학 농구선수가 되다니 꿈만 같아"라고 말하는 학교의 스타도, "성공해서 돌아 올께"라는 말을 남기고 떠난 수줍은 낙오자도 자신의 인생이 어떤 식으로 풀려 갈지 짐작하지 못한다.

그들이 알고 자란 미국은 이 영화의 원제이기도 한 <약속의 땅 Promised Land>이었므로. 소년들이 나고 자란 소도시 애쉬빌을 떠난다는 것은 곧 기회를 의미했다. 아이들은 넓은 세상으로 나서면 성공과 행복이 널려 있다고 믿었다. 마음만 먹으면 낙원으로 가는 열쇠를 잡을 수 있는 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인 제목의 영화 <아메리칸 드림>은 그 순진한 꿈이 조각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박살나는 과정을 그린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2년 후의 크리스마스, 그 며칠 동안 갓 스무 살이 된 두 쌍의 남녀가 헤매 다니는 고속도로와 혼란스러운 다툼을 쫓는 이 영화는 그들의 꿈이 얼마나 앙상한 것이었는지 샅샅이 헤짚는다.

농구 경기에서 승리하고 예쁜 여자친구와 미래를 이야기하던 행콕은 재능이 없다는 이유로 대학 농구팀에서 쫓겨난다. 젊은이들의 좌절을 그리는 영화가 흔히 그러듯, 사고나 약물중독같은 필연적인 이유를 갖다 붙이지도 않는다. 그는 치열한 바깥 세상에서 살아 남기에는 실력이 모자랄 뿐이며, 그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그에게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가진 것 없는 소년 대니도 마찬가지다.

그의 아버지는 "미국에서는 원하는 누구나 상원의원이 될 수 있다"고 되풀이해 말하지만 그 믿음에는 근거가 없다. 남들이 가르친 신념에 의지하면서 정작 자신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그의 무기력한 모습은 2년 만에 돌아온 아들 대니를 집에서 내몰고 만다. 미움보다 불신보다, 대니에게는 껍질 뿐인 아버지가 더한 절망이다.

<아메리칸 드림>의 소년들이 사는 황폐한 미래는 미국인들이 흔히 행복의 상징이라 믿는 풍경들과 대조되면서 더욱 건조한 체념으로 다가 온다. 영화가 시작한지 얼마 안 되어 대니는 여자친구 베브 곁에서 눈을 뜬다. 성공을 말하며 떠났으므로, 관객은 당연히 그가 여자와 돈과 보장된 미래를 가진 젊은이가 되어 있을 것으로 믿는다.

그러나 카메라가 침대에서 멀찌감치 물러설 때, 초라한 방의 깨진 유리창 사이로 찬 바람이 밀려 든다. 눈보다 피부로 먼저 느껴지는 그 추위는 관객을 잠시 당혹하게 만들지 모르지만, 생각해 보라. 고등학교 졸업장도 받기 전에 집을 나와 버린 18세 소년에겐 그 2년 동안 생존하는 것만도 벅찬 일이었을 것이다. 결혼식장에서 술에 취해 주정하는 베브나마 감사하게 받아 들이며 고향으로 돌아간 그는 바깥 세상이 환상이었듯 고향 역시 그가 기억하는 모습과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유일하게 '아메리칸 드림'에 다가선 사람은 치어리더였던 행콕의 여자친구 메리다. 그녀는 아직도 대학에 다니고 있고 안정된 그녀의 집안은 계속해서 학비를 대 줄 능력이 있다. 그런 그녀마저도 이 영화에서는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어린 시절 자주 찾곤 했던 천사상이 버려지자 그 날개를 주워 와 정성껏 닦는 그녀의 모습에서는 바깥 세상에서 짊어지고 온 피로만이 묻어 난다. 메리는 고향으로 돌아와 쉬고 싶지만 욕심이 그녀를 놓아 주지 않는다.

영화는 이 네 명의 남녀가 편의점 주차장에서 맞부딪치도록 몰아 간다. 자신들이 원하는 가족은 결코 찾을 수 없으리라는 냉혹한 진실에 지쳐 편의점을 터는 대니와 베브. 경찰이 된 행콕은 라이플총을 들고 그들과 마주한다.

누가 행콕에게 친구를 쏘도록 강요했을까. '약속의 땅'을 저주하는 행콕의 꿈은 어디서부터 망가지기 시작했을까. 대니와 베브가 광활한 사막을 질주할 때조차 답답하게 짓누르는 무게를 벗어버리지 않는 <아메리칸 드림>은 '왜'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아 본질에서 겉돈다.

그러나 이 영화가 보여 주는 삶은 그 자체만으로 질문을 유도한다. 티없는 웃음의 멕 라이언이 알코올에 젖어 하늘을 향해 총을 쏘고 <유혹의 선>의 야심찬 키퍼 서덜랜드가 눈물 흘리며 흔들리게 하는 영화.

웅장한 성가대의 합창이 끼어들고 사막의 스펙터클을 강조하는 카메라가 영화의 끈을 놓치게 하지만, 제작된 지 12년 만에 한국에서 개봉된 <아메리칸 드림>은 보기 드물게 암울한 청춘영화다. 산만한 대신 거짓이 없다.

<김현정(parady@film2.co.kr)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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