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정상 합의'의 민족사적 의미

  • 입력 2000년 6월 14일 19시 33분


가슴이 찡 울리는 감격스러운 장면이었다. 어제 2000년 6월14일 밤, 평양 백화원 영빈관에서 남북한의 정상은 새천년 한반도의 미래를 화해와 평화의 산실로 만들어 나가자는 역사적 합의문에 서명했다. 서명을 마친 후 두 정상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이번의 소중한 합의를 지켜 나가자고 다짐하듯 굳은 악수를 나눴다.

정상회담 직후 평양 목란관에서 열린 만찬장의 분위기도 화기애애했다. 벌써 남북간에 평화 무드가 자리잡은 듯 시종 웃음과 덕담 농담이 그치지 않았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만찬사에서 “남과 북은 함께 번영을 이룩해야 하는 공동운명체로서 책임있는 당국자간의 지속적 대화가 이뤄져야 한다”며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의 서울 답방을 희망한다”고 밝히자 참석자들 모두가 수긍했다. 김위원장은 적절한 시기에 서울을 방문키로 이미 합의한 상태였다.

한 핏줄이면서도 상잔(相殘)의 전쟁을 치르는 등 무려 55년을 적대와 반목으로 지새운 우리 민족에게도 이제 손잡고 협력하며 신뢰로 감싸안는 새 시대가 오는 것인가.

김대통령과 김국방위원장이 합의 서명한 통일 문제의 자주적 해결, 남북통일방안의 접점 모색, 이산가족 상봉과 경제 사회 등 다방면의 교류 협력 및 당국간 대화계속 등 5개항은 “우리도 할 수 있다. 통일을 이룰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 줬다. 그것도 폐쇄된 밀실에서의 은밀한 합의가 아니라 생방송으로 지구촌 온 인류가 지켜보는 가운데 일구어 낸 합의이기에 그 약속이 더욱 값지다.

어제 남북 두 정상은 오후 3시부터 6시50분까지 잠시 휴식을 빼고 3시간5분 동안 마라톤회담을 가졌다. 회담에서는 남북간의 모든 문제에 대해 흉금을 털어놓고 말하는 허심탄회한 의견 교환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거기서 두 정상은 화해 협력 신뢰의 문제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민족의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데에까지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상이한 정치체제 아래서 각자가 바라는 통일이 있음에도 상대의 감정과 입장을 고려해 아끼던 용어를 서슴없이 합의문에 포함하는 결정을 내린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남과 북은 92년의 기본합의서 전문에 상호 관계를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 관계”로 규정하고도 화해와 불가침, 교류 협력만을 조문화했었다. 당시 통일에 관한 실천 사항을 명시하지 않은 점에 비추어 이번 정상회담에서 합의문의 첫머리에 통일을 명기한 것은 그만큼 양 당사자와 민족의 염원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통일을 향한 길이 참으로 가파르고 또 그 방법과 과정을 둘러싼 해석과 입장의 조율이 쉽지 않을 것이지만 ‘통일을 향한 협력’을 적시함으로써 ‘한 민족으로 공존 공영의 길로 나아간다’는 것을 세계에 거듭 알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합의문 전반을 관통하는 한반도에서의 화해와 긴장 완화 및 항구적 평화 정착 문제는 남북 당사자와 그 국민은 물론 세계인이 공통으로 갈구해 온 사항이다. 분쟁없이 평화롭고 질 좋은 삶을 영위하자는 인류의 바람을 합의문에 담아냄으로써 한반도뿐만 아니라 지구촌 전체에 평화의 희망을 주는 메시지를 채택한 셈이다. 지구촌의 유일한 ‘냉전의 섬’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나 21세기 새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평화 질서의 모델을 제시한 것이기도 하다.

합의문 3항에 담은 이산가족의 상봉을 위한 노력은 민족의 비원(悲願)을 더 늦기 전에 풀어 보자는 두 정상의 의지를 담았다. 이념과 체제의 희생물로 반세기가 넘도록 소식조차 모른 채 헤어져 살아야 했던 남과 북의 1000만 이산가족에게 희망을 안기는 소식이다. 남북 정상은 특히 이산가족 상봉 문제를 과거처럼 1회용 전시용으로 접근하지 않고 진정 아픔을 치유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은 듯 만찬장에서도 이 문제를 주된 화제로 삼았다.

이와 함께 남북정상은 경제 사회 등 다방면의 교류 협력을 활성화하기로 합의, 상이한 정치체제의 이해를 초월해 민족이 손을 잡아 결국 하나가 되는 길을 모색하는 입장임을 분명히 했다. 이는 정상회담 전 경제 협력을 주로 논의할 것이란 예상을 뛰어넘어 말 그대로 모든 분야에서 통일에 대비한 협력 체제를 갖추자는 의미로 풀이된다. 당장 대북 투자의 활성화 등 경제 차원 협력의 물꼬가 트일 것으로 기대되는 대목이다.

이제 남북 관계는 한 개의 큰 산을 넘었다. 단 한번의 만남으로 이런 정도의 합의를 도출해낸 것은 정상회담의 역사에서 일찍이 없던 일이다. 성과가 놀랍기도 하지만 한편 합의 정신을 소중히 지키고 다듬어 나갈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서는 것도 사실이다.

남북이 진심으로 서로를 믿어야만 소중한 합의도 결실을 맺을 수 있다.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남북이 각자 서두르지 말고 쉬운 것부터 차근차근 해결해 나가는 슬기를 모아야 할 때다. 그래야만 21세기 민족의 공존과 번영을 이룰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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