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김충식/일본 그리고 '惡友'

  • 입력 2000년 5월 28일 19시 50분


일본 돈 1만엔짜리의 ‘얼굴’ 후쿠자와 유키치는 한국과 중국을 악우(惡友)라고 했었다. 한 세기 전 일본이 아시아에서 벗어나 서양처럼 되자는 이른바 탈아입구(脫亞入歐)를 외치던 무렵이었다. 한마디로 고루하고 가난한 ‘별 도움이 안되는 친구들’이라는 의미였을까. 세월이 흘러 99년 일본 관광객이 미국(484만명) 다음으로 많이 가본 나라가 ‘악우’ 한국(211만명)과 중국(123만명)이다. 올해 일본의 관광백서 통계다.

▷일본인이 많이 드나드는 한국 중국의 일본관은 어떨까. 좋은 이웃, 훌륭한 친구라고 말하지만은 않는다. 지난 세기 일본의 식민지배나 침략으로 인한 상처, 그 고통을 들쑤시는 일본 정치인들의 망언도 작용할 것이다. ‘식민지배로 좋은 일도 했다’ ‘난징(南京)학살은 없었다’ 등등. 그래서 피해본 측은 오히려 일본을 악우라고 느낄 정도다. 그저 돈은 많이 벌었지만 마음 속으로 존경하기 어려운 ‘졸부(猝富) 악우’쯤으로.

▷일본의 한 평론가가 최근 ‘송사리 사회’라는 말로 자탄하는 것을 읽었다. 일본인들은 옳고 그름의 판단을 다른 일본인들이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맡기고, 이리저리 쏠려 다닌다는 표현이다. 그래서 집단으로 저지른 일은 죄로 여기지 않고 사죄도 반성도 시늉뿐일지 모른다. 이웃나라가 보기에는 딱한 역사인식, 보편성의 잣대로 보면 우스운 속내가 끝없이 드러난다. 원한을 바른 것으로 갚는다는 이직보원(以直報怨)의 자세와는 너무 멀다.

▷모리 요시로 일본 총리가 29일 방한해 한일 정상회담을 한다. 그는 최근 ‘일본은 천황을 중심으로 한 신(神)의 나라’라는 발언으로 일본 안에서도, 이웃나라로부터도 비웃음을 샀다. 그는 지난 10일 중의원에서 “과거 천황의 교육칙어에 좋은 점도 있었다”고 했다. ‘식민지배는 조선에도 좋은 점이 있었다’던 일본식 역사인식을 떠올리게 한다. 일본 관광객이 한중(韓中) 이웃에 돈을 뿌리고 총리의 ‘몸’이 다녀간다고 다 되는 게 아니다. 이웃들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돈이 다 무슨 소용이랴. 일본의 외교적 성공을 위해서라도 ‘송사리’식의 역사인식은 문제다.

김충식<논설위원>sears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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