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는 흑싸리 껍데기?…호주제 폐지 운동 확산

  • 입력 2000년 5월 6일 13시 34분


A씨(여·52세)는 얼마 전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고 두 딸과 함께 큰 슬픔에 빠졌다.그러나 슬픔도 잠시…. 이어지는 충격에 A씨는 급기야 쓰러졌다. 장례식장에 젊은 여인이아홉 살 난 사내아이를 고인의 아들이라며 데리고 들어선 것. 그 사내아이는 남편의 ‘혼인외자’로 출생신고가 돼있었다.

민법에 따르면 30년을 산 처는 물론 20대의 두 딸도 아홉 살 짜리 배다른 남동생에게 호주자리를 내줘야 했다. 결국 호주제 앞에서는 혼인의 신성함과 딸자식들은 아무 소용 없었던 것.

호주제 폐지를 위한 여성단체들의 활동이 활발해 지고 있다.

지난 98년 11월 창립한‘호주제 폐지를 위한 시민의 모임’(이하 호폐모)은 호주제 폐지운동의 선구자다. 호폐모는 1년 넘게 길거리 서명운동을 펼쳤다. 또 인터넷 상에서(antihoju.jinbo.net) 호주제 폐지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다. ‘호주제 폐지의 공론화’가 호폐모의 주 활동. 호폐모의 활동을 계기로 호주제의 현황과 문제점 등을 점검한다.

▼호주제, 왜 없애야하나▼

민법 제 984조에 따르면 호주 사망시 아들이 호주승계를 하고,

아들이 아버지인 호주보다 먼저 죽었다면 손자가 호주승계를 하며 아들·손자가 없을 경우 비로소 결혼하지 않은 딸이 호주가 되고 미혼의 딸도 없을 경우 처가 호주가 된다.

결국 부인은 아들, 딸, 장차 태어날 손자보다도 가정 내에서의 법적 지위가 낮다는 것.

호주승계순위에 대해 김자경씨(여·23세·호폐모 회원)는 “장유유서(長幼有序)는 무너지고 남존여비(男尊女卑)만 남았다"고 비판했다.

“우리의 전통인 호주제를 죽어도 버릴 수 없다” 이는 호주제 존속을 바라는 사람들의 신념.

그러나 호폐모측은 “현재의 호주제가 일본이 식민지 수탈을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공포한 조선 호적령에서 기초가 마련된 것”이라며 반박한다.

당시 일본은 호주를 파악해 징병, 징세, 독립군 색출을 위해 자국의 호주제를 우리나라에 그대로 이식한 것.

그러나 호주제를 남기고 떠난 일본은 정작 1974년 가족법을 개혁, 부부와 미혼자녀만을 호적에 기록하는 방법으로 호주제를 없앴다.

결국 우리는 호주제 문제점 때문에 '종주국'인 일본조차 없앤 ‘호주제’를 ‘전통보호’라는 잘못된 명목으로 끌어안고 있는 셈이다.

▼호적, 어떻게 바꿀까▼

호폐모가 제안하는 궁극적인 대안책은 1인 1호적제도.

이는 개인 한명 한명에게 호적을 주는 방안으로 남녀차별을 없애고 개인을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가장 이상적인 형태라는 것.

그러나 일부에서는 이제껏 지켜온 호주제를 없애고 1인1호적제도로 바꾸기 위해서는 국민들의 의식변화가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호폐모 남성회원인 유재언씨(남·27세)는 “아마 큰 계기가 없으면 국민들의 호주제에 대한 인식은 바뀌기 힘들 것”이라며“먼저 제도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호폐모는 호주제 폐지를 위해 네티즌을 대상으로‘부모성 함께 쓰기’운동을 펼치고 있다.

▼호폐모는 어떤 단체?▼

호폐모는 ‘호주제 폐지’를 목표로 뭉친 시민들의 모임.

현재 회원수 500여명. 이들이 이미 호주제 폐지를 위해 10,000여명의 서명을 받기도 했다.

호폐모는 2년여의 노력을 통해 한국가정법률상담소·한국여성단체연합·한국여성단체협의회·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과 함께 2000년도 입법개정청원을 준비중이다.

호폐모는 생활속에 작은 개혁운동을 펼친다. 호주제 폐지운동의 경우 짧은 기간에 열매를 따기 보다는 오랫동안 운동을 펼쳐 점차 개혁하겠다는 입장.을 장기적으로 펼칠 계획이다.

호폐모의 열성 멤버인 유재언씨는 “어차피 하루이틀에 끝날 운동이 아니잖아요. 오래 견뎌내기 위해서는 인상 찡그리지 말고 재미있게 하는 것이 중요해요”라고 말한다.

‘호주제 폐지’를 이루어내는 그 날까지 거북처럼 끈질기게 한 걸음 씩 다가가겠다는 호폐모 회원들. 즐기며 일한다는 그들의 모습에서 진정한 시민의 힘을 발견할 수 있다.

이희정/동아닷컴기자 huib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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