팹리스? 파운드리? 반도체 산업의 모든 것[곽재식의 안드로메다 서점]

  • 동아일보

◇반도체 제국의 미래/정인성 지음/440쪽·2만2000원·이레미디어

혹시 아끼는 옷이나 가방이 있는가? 아마 하나쯤은 생각나는 물건이 있을 것이다. 어느 브랜드인지도 생각날 것이다. 그런데 혹시 그 물건을 어디에서 만든 것인지 아는가? ‘Made in Korea’ 같은 말이 적혀 있었다면 국적 정도는 기억날 것이다. 그러나 그 물건을 생산한 곳이 누구 소유의 어떤 회사인지, 어느 도시에 있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적을 것이다.

패션 제품은 이렇게 그 물건을 디자인한 회사와 생산하는 공장을 운영하는 회사가 다른 경우가 대단히 많다. 앙드레 김 같은 유명한 디자이너가 옷을 디자인하더라도 앙드레 김의 이름이 새겨진 제품을 앙드레 김 선생이 직접 재봉틀을 돌려서 만들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선진국의 브랜드는 디자인만 개발하고 실제 생산은 다양한 브랜드의 제품을 주문받아 대량 생산하는 공장을 가진 개발도상국 회사에서 일어나는 것이 패션 업계에서는 기본이다.

다른 제품도 이런 식으로 만드는 것이 있을까? 21세기 이후, 세계의 대규모 반도체 회사들은 이렇게 설계와 생산을 분리해 사업을 하는 곳들이 많다. 엔비디아나 AMD 같은 업체들은 실제 생산 공정을 운영하지 않고 설계만 한다고 해서 ‘팹리스(fabless)’라고 부르는데, 이런 회사들이 현재 세계 반도체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반도체 산업이 재미난 점은, 그렇다고 해서 공장에서 제품을 생산하는 회사들이 그냥 기계만 돌리는 ‘을’ 입장이 아니라는 것이다. 생산 기술 그 자체를 세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린 주문 생산 전문 회사들은 그 기술을 무기로 오히려 팹리스 못지않은 막대한 이익을 누린다. 이런 주문 생산 전문 반도체 회사들을 ‘파운드리(foundry)’라고 하는데, 아시아 전체에서 가장 큰 시가총액을 자랑하는 기업인 대만의 TSMC가 여기에 속한다.

그러면 또 다른 분야에서도 이런 분업을 해 볼 수 있을까? 국내의 바이오 기업 중에는 위탁생산(CMO) 또는 위탁개발생산(CDMO)이라고 해서 다른 회사에서 개발한 약에 대한 주문을 받아 거대한 공장을 통해 대신 대량 생산해 주는 일로 사업을 하는 곳들이 있다. 그런가 하면 최근 국내의 한 자동차 회사는 로봇을 파운드리 형태로 주문 생산하는 사업을 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기도 했다. 기계를 믿음직하게 대량 생산하는 데 경험이 많은 자동차 회사에서 다채로운 도전에 유리한 중소기업과 스타트업의 로봇 설계도대로 제품을 찍어내 주는 일을 한다면 서로 좋지 않겠냐는 발상이다. 과연 이런 업체 중에 반도체 분야의 엔비디아나 TSMC처럼 분업으로 큰 성공을 거두는 업체들이 나올 수 있을까?

저자가 반도체 업계에서 일하며 느낀 경험을 토대로 요즘 세계 반도체 업계에 대해 해설한 ‘반도체 제국의 미래’는 반도체 산업이 분업을 전후로 어떻게 달라졌고 어떤 기업이 흥했으며 어떤 회사는 망했는지를 설명한 책이다. 기술적으로 어려운 내용을 과감하게 다루고 있으면서도 컴퓨터, 인터넷, 스마트폰같이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소비자 기술의 변화가 어떻게 반도체 기술의 핵심에 영향을 미쳤는지 또한 충분히 설명하고 있다.

워낙 급격히 발전하는 반도체 시장인지라 책이 나온 2024년 이후 불과 2년이 지나는 동안 세상이 달라지긴 했다. 그러나 구체적인 소비자 제품과 사례를 충분히 언급하면서도 기술과 사회가 변화하는 경향과 원리를 짚으려고 노력한 책이다. 덕분에 여전히 최신 정보를 다룬 기사 이상으로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팹리스#파운드리#반도체 산업#TSMC#반도체 제국의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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