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김재홍/中 5·4운동과 蔡元培

  • 입력 2000년 5월 3일 19시 36분


1919년 오늘 중국 전역에서 벌어진 5·4운동은 중국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현대사에도 큰 영향을 끼친 분수령이었다. 그보다 두달 앞서 일어난 3·1운동이 우리의 독립사상과 문화운동에 끼쳤던 것과 비슷하지만 중국의 국가규모 때문에 그 폭발력은 훨씬 더 컸을 것이다. 우리의 3·1운동이 중국의 5·4운동을 유발했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두 운동 모두 식자층이 주도했고 국가지도자를 다수 배출했다는 점에서 유사한 것은 사실이다.

▷5·4운동에서 주요인물을 들라면 단연 차이위안페이(蔡元培) 당시 베이징(北京)대 총장이다. 1916년부터 10년간 베이징대 총장을 지낸 그는 혁명적 교육사상가였다. 이 시기에 베이징대 교수들은 중국의 봉건적 사회질서를 바꾸기 위해 신사상을 전파하는데 헌신했으며 차이 총장이 그 중심역할을 했다. 다른 한편 대학생들은 외세에 의해 중국 영토가 분점되고 주권이 제약당하는 현실을 타파하고자 ‘행동하는 지성’으로 캠퍼스 바깥에 뛰쳐나가곤 했다.

▷차이는 1912년 쑨원(孫文)정부의 교육총장을 지내다가 군벌인 위안스카이(袁世凱)정권이 들어서자 프랑스로 건너갔다. 그는 거기서도 고학하며 공부하는 근공검학(勤功儉學)운동을 지도했다. 이때 2000여명의 중국 학생과 노동자들이 공장에서 일하며 학업에 정진했다. 훗날 중국의 지도자가 된 많은 유학생이 이 운동에 참여했다. 마오쩌둥(毛澤東)과 함께 중국 공산혁명을 주도한 저우언라이(周恩來)도 그 중 한 사람이다. 마오는 그후 차이가 베이징대 총장일 때 그 대학 도서관의 사서로서 인연을 맺었다.

▷차이는 베이징대 시절 천두슈(陳獨秀) 리다자오(李大釗) 후스(胡適) 같은 고급 학자들을 교수로 초빙했다. 천과 리는 나중에 중국 공산당을 창당할 만큼 급진적 지식인이었다. 차이는 이런 급진 인사들을 거느리면서도 교육자로서 학교질서를 지켰다. 그는 자신의 사직에 항의시위하는 학생들에게 “좋은 말을 길가의 아이들이 손뼉 친다 해서 계속 달리게 하면 죽고 만다”고 했다. 오늘날 인기에만 영합하려는 정치인이 있다면 들려주고 싶은 말이다.

김재홍<논설위원>nieman96@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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