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 산불 현지표정]"軍화약고 불 번질라" 주민 대피

  • 입력 2000년 4월 12일 19시 23분


하늘은 온통 연기로 뒤덮였고 땅은 검게 그을렸다. 주민들은 넋이 빠져 말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소방 헬기와 소방차 사이렌 소리, 군과 경찰 예비군 병력의 부산한 움직임 등으로 강원 영동지역의 산불 현장은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삼척▼

○…12일 삼척시 원덕읍 일대는 온통 연기로 뒤덮여 하늘을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원덕읍에서 내륙으로 3㎞ 가량 떨어진 산불 현장은 여기저기 숯덩이가 나뒹굴었다. 산불이 휩쓸고 간 곳은 흑갈색이던 토양이 적갈색으로 변했다.

7일 불이 났다가 9일 1차 진화됐던 삼척시 근덕면 궁촌1리에서는 11일 오후 산불이 재발, 총 119채의 가옥 중 15채가 불에 탔다.

마을 어촌계장인 이광훈(李光勳·57)씨는 “소방차가 와 지붕에 물만 뿌려줬어도 이러한 가옥 피해는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주민 김진녀씨(65)는 “모두 불에 타 당장 밥 해먹을 그릇이 하나도 없다”며 눈물을 흘렸다.

○…산불 진화를 위해 대규모 군 병력이 투입되고 예비군 동원령이 내려지는 등 강원 동해안 지역은 ‘전시상태’와 마찬가지.

동해안 경계를 총괄하고 있는 육군동해충용부대는 12일 오전 7시 1500여명의 병력을 삼척 산불지역에 긴급 투입하는 등 이날 하루 5000여명의 병력과 헬기 14대를 강릉과 고성 등 3곳의 산불 현장에 투입했다.

또 12일 오전 2시를 기해 삼척지역에, 오전 7시를 기해 강릉지역에 각각 예비군 동원령이 내려져 이 지역 예비군 8000여명이 긴급 투입됐다.

▼강릉▼

○…12일 새벽 강릉시 홍제동에서 발생한 산불은 거센 바람을 타고 삽시간에 동해고속도로를 넘어 시내로 번져 홍제동과 교동 마을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산골짜기를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돼 있는 교동(속칭 원댓재 마을)은 산불 발생 30분만인 오전 3시경 거대한 불길이 덮쳐 가옥 20여채가 순식간에 타버렸다.

주민 김순예씨(78)는 “가스통 터지는 소리가 들려 가재도구를 챙길 생각은 엄두도 못내고 몸만 간신히 빠져 나왔다”고 말했다.

최낙중씨(62)도 “소방차 소리에 잠을 깨 보니 앞산에서 거대한 불길이 치솟은 뒤 순식간에 집으로 옮겨 붙어 급히 가족을 깨워 도망치듯 피했다”며 긴박했던 상황을 전했다.

○…산불이 시내로 급속히 확산되자 춘천지검 강릉지청과 춘천지법 강릉지원, 강릉시 제2청사에서는 비상 소집된 직원들이 서류를 안전한 곳으로 옮기느라 북새통을 이뤘다.

직원들은 청사 뒷산에까지 불이 옮겨 붙자 중요한 서류상자와 컴퓨터 등을 차에 싣고 안전한 곳으로 옮기는 한편 청사까지 불이 번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진화작업을 폈다.

또 이날 오전 3시반경 3000여가구의 아파트가 몰려 있는 교동 택지지구 인근까지 불길이 번지자 주민들이 차량으로 급히 대피하느라 인근 도로가 큰 혼잡을 빚었으며 차량 충돌사고도 잇따랐다.

▼동해▼

○…12일 동해시는 삼척에서 발생한 산불이 강한 바람을 타고 옮겨 붙어 시 전체가 연기와 재, 매캐한 냄새로 뒤덮였다. 온종일 헬기가 날아다니고 소방차의 사이렌 소리도 그치지 않았다.

군과 소방인력은 헬기 10여대를 동원해 진화작업에 나섰지만 오후 늦도록 불길을 잡지 못했으며 특히 천곡동 해군 제1함대 사령부에 있는 대형 화약고에 불이 번지지 않을까 전전긍긍했다.

동해시는 이날 오전 초속 20m의 돌풍을 타고 남하하던 불길이 갑자기 방향을 바꿔 북상, 해군 화약창고까지 다가가자 마을마다 사이렌을 울리며 주민들에게 바닷가로 대피하도록 가두 방송을 했다.

회사원 정은호(鄭恩浩·38)씨는 “어려서부터 이곳에 살았지만 이렇게 큰 불은 처음 본다”며 “군 화약고로 불이 옮겨 붙을 경우 동해시 전체가 날아가버리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말했다.

:고성: ○…11일 오후 마을을 덮친 산불로 졸지에 집을 잃은 고성군 거진읍 거진 2리 속칭 빨래골의 20여가구 주민들은 친인척을 찾아가거나 마을회관에 모여 뜬눈으로 밤을 보냈다.

집 앞 텃밭에서 일하다 불길이 덮치는 바람에 아무 것도 챙기지 못하고 몸만 피했다는 홍춘자(洪春子·64·여)씨는 “말로만 듣던 산불이 이렇게 무서운 줄 몰랐다”며 순식간에 잿더미가 돼버린 집을 바라보며 한숨지었다.

<강릉 삼척 고성〓최창순 경인수 남경현 이명건기자>sunghyu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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