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마취]"건망증 유발"은 잘못된 속설

  • 입력 2000년 4월 12일 14시 07분


주부 김모씨(31)는 며칠전 백화점에서 화장실에 간다며 남편과 헤어진 뒤 ‘깜빡’ 남편을 놔두고 집에 혼자 왔다. 아파트 주부들은 제왕절개로 아이를 낳으면 마취 때문에 머리가 나빠졌다는 얘기를 나누며 ‘맞아맞아 진단’을 한다. 과연 그럴까?

이는 마취의 과정과 부작용에 대해 잘 몰라 생기는 대표적 오해. 김씨는 스트레스 탓에 건망증이 생긴 것이고, 마취를 받았다고 해서 머리가 나빠지는 법은 없다.

▼마취란?▼

온몸이나 특정부위를 의식 감각 운동 반사행동이 없는 상태로 만드는 것. 본래는 ‘감각을 없앤다’는 뜻이었지만 요즘엔 ‘수술 환자의 관리’라는 뜻으로 쓰인다. 즉 수술실에서 환자의 의식을 잠재우고 호흡 혈압 등까지 관리하는 일련의 과정을 아우르는 말.

한자로는 ‘痲醉’와 ‘麻醉’ 두 가지로 쓰이는데 대한마취과학회에선 ‘麻醉’만 인정하고 있다.

▼온몸마취 겁낼 것없다▼

마취엔 온몸을 마취하는 ‘전신마취’와 척추아래 팔 다리 등 일정 부위를 마취하는 ‘부위마취’, 말초신경의 기능을 일시정지시키는 ‘국소마취’가 있다.

치과치료 때나 부정맥 치료제로 많이 쓰이는 국소마취제 리도카인은 조루증 개선 연고의 주요성분으로도 쓰인다.

일반인은 특히 전신마취에 대해 공포심을 느끼지만 그럴 필요없다는 것이 전문의들의 말.

전신마취 때는 우선 정맥주사로 50초 안에 깊은 잠에 빠질 수 있는 수면제와 근육이완제를 투여한다. 근육이완제를 투여하는 이유는 수술 중 횡경막과 온몸의 근육이 꿈틀대는 것을 막아 보다 정확한 수술을 하기 위해서다.

다음으로 환자의 기관지에 관을 꼽고 흡입마취제와 ‘웃음가스’로 알려진 아산화질소를 함께 투여해 마취상태를 유지하면서 한편으로는 산소를 투여해 인공적으로 숨쉬도록 한다. 수술이 끝나가면 마취과 의사는 흡입마취제의 양을 줄이면서 근육이완제의 작용을 억제하는 약을 투여, 환자가 깨도록 만든다.

이같은 전신마취는 특수마취기계에 의해 이뤄지는데 각종 경보장치가 달려 있어 마취과 의사가 수술실을 떠나지 않는 한 사고가 날 위험은 거의 없다.

▼마취와 뇌▼

마취약은 뇌세포를 잠들게 할 뿐, 죽이지 않으므로 뇌에 아무 영향을 주지 않는다. 대기의 산소농도가 20%지만 마취 때는 50%가 공급되므로 뇌가 되레 신선해진다는 주장도 있다.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드는 구강질환으로 20회 이상 전신마취를 받았어도 ‘20세기의 천재’란 말을 들었다.

다만 마취유도제로 쓰이는 수면제 중 하나인 케타민은 깊은 수면효과가 있고 부작용은 거의 없는 반면 마취 중이나 깰 때 심한 악몽을 꾸게 만든다.

한편 마취효과가 있어도 마취제가 아닌 것도 있다. 위 내시경검사 때 미다졸램이란 약을 투여하면 환자는 고통을 호소하지만 검사가 끝나면 아팠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짧은 순간의 기억을 지워버리기 때문에 가능한 것.

▼마취제의 부작용▼

일부에서 간 독성이 문제. 할로탄이란 마취제는 3만5000명 중 1명에게서 치명적 간 독성이 생기는 점 때문에 요즘엔 거의 쓰이지 않고 엔푸루란을 많이 쓰는데 이것 역시 100% 안전하지 않다. 아이소푸루란 등 간 독성이 없는 약은 의료보험 적용이 제한적인게 흠.

임신부가 교통사고 등으로 전신마취를 받아도 기형아 출산율은 다른 경우보다 높지 않은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다만 임신부가 위에 소화되지 않은 음식물이 있는 상태에서 마취받으면 음식물과 위산이 식도를 통해 폐로 들어갈 위험이 있다. 또 소아는 감기기운이 있을 때 마취하면 기도가 막힐 우려가 있다.

극히 일부에게선 ‘전신마취 중 각성상태’가 나타난다. 이때 통증을 느낄 수는 없지만 정신은 또렷해 수술실의 대화를 모두 듣기도 한다.

▼무통분만▼

19세기 영국의 산부인과 의사 제임스 심프슨박사가 흡입마취제 클로로포름을 이용한 무통분만을 유행시켰다. 당시 교회에선 “산통(産痛)은 하느님의 선물”이라며 심프슨을 화형시키려고 했으나 빅토리아여왕이 무통분만으로 아들 레오폴드를 분만함으로써 심프슨은 살아날 수 있었다.

요즘 무통분만은 대부분 부위마취로 이뤄진다. 척추 등골 깊숙이 마취제를 넣는 ‘척추마취’와 척추 경막 바깥 부위에 마취제를 넣는 ‘경막외 마취’가 있다.

한편 자궁이 더 빨리 수축하고 마취가 끝난 뒤 통증이 서서히 온다는 장점 때문에 제왕절개술 때도 전신마취 대신 부위마취하는 병원이 늘고 있다.

(도움말〓고려대안암병원 마취과 장성호교수, 세연신경통증클리닉 이영철원장)

▼마취과 의사의 세계▼

‘수술실의 관리자’인 마취과 의사. 일반외과 의사와 마찬가지로 자칫 잘못하면 ‘큰 사고’가 나기 때문에 규율이 엄하며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술자리도 잦다.

이들은 건배할 때 ‘마취’라고 외치는데 “마구 취하자”의 준말. 다른 과 의사들은 서로 ‘김박사’ ‘박선생’ 등으로 부르지만 이들은 서로 ‘김도사’‘박도사’로 부른다.

마취과 의사는 수술실 관리 뿐 아니라 중환자실 환자의 호흡 및 통증관리, 응급실 환자의 심폐소생도 맡는다. 최근엔 ‘통증클리닉’을 운영하면서 진통소염제나 물리치료로 낫지 않는 만성통증을 고치고 있다.

통증은 외부 자극이 일정한 세기를 넘어 몸에 해가 될 성 싶을 때 울리는 일종의 ‘사이렌’. 사이렌이 고장나 ‘경보상황’이 해제됐는데도 계속 울리는 것이 만성통증이다.

통증클리닉에선 마취약의 농도와 양을 줄여 신경에 주사로 넣는 방법으로 신경을 달래거나 죽여서 통증을 줄인다.

두통 생리통 오십견 목통증 대상포진 삼차신경통 등 100여가지의 만성통증을 누그러뜨리며 다한증(多汗症) 변비 등도 고치고 있다.

<이성주기자>stein33@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