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김재홍/상하이임정의 지역주의

  • 입력 2000년 4월 9일 20시 50분


10일은 1919년 상하이임시정부의 의회였던 의정원이 첫 회의를 연 날이다. 제1회 의정원 회의가 중국 땅인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租界) 김신부로(金神父路)에서 29명이 참석한 가운데 이틀간 열렸다. 이 회의는 짧은 회기였지만 역사적 업적을 남겼다. 헌법에 해당하는 임시헌장과 정강을 선포했고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했다. 군주제였던 대한제국 이후 민주공화제가 공식 채택된 것도 이 헌장에서다. 정부형태로 내각책임제가 처음 도입되기도 했다.

▷임시헌장은 비록 10개조에 불과했지만 그 내용을 보면 민주주의의 골자가 모두 포함돼 있다.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 귀천 빈부계급이 없고 평등’하며 ‘신앙 언론 저작 출판 결사 집회 거주이전 소유의 자유’를 향유한다고 명기했다. 우리 의회의 명칭을 ‘국회’로 정한 것도 이 헌장이다. 헌장 제10조가 “국토 회복 후 만 1년 내에 ‘국회’를 소집함”이라고 정해놓은 것이다. 이밖에 국제연맹 가입이나 생명형(사형) 폐지 조항은 독립지사들이 해외 신사조에 밝았음을 알려준다.

▷그러나 상하이임정이 처음부터 유일한 임시정부는 아니었다. 3·1운동 이후 국내외에 알려진 임정이 6개나 됐다. 그중 실체가 분명한 것이 상하이임정, 노령(露領)의 대한국민회의정부, 서울에서 13도 대표 24명이 모여 선포한 한성임시정부였다. 당시 외신도 대한국민을 대표하는 임시정부를 상하이와 한성의 2개로 타전했다. 그래서 임정통합운동이 벌어졌으며 그 과정에서 지역적 대립이 나타났다.

▷임정에서 가장 심각한 지역대립은 영호남이나 한강의 이남 이북 같은 국내 출신지보다도 상하이와 노령 사이에서 일어났다. 이승만(李承晩)과 이동휘(李東輝)를 통합시키는 이른바 양이합작(兩李合作)이 실패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임정은 상하이에 모인 동포들을 국내, 노령, 중국, 미국 등 11개 출신지별로 나누고 그 지방 대표회의에서 의원을 선임하게 했다. 그 결과 지역을 중심으로 주도권 싸움도 벌어졌다. 선거가 지역의식을 부추긴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민주적 대표성이 보장되면서 지역주의도 극복하는 정치제도가 고안돼야 할 것이다.

김재홍<논설위원>nieman96@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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