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흑색선전

  • 입력 2000년 4월 8일 19시 23분


제33대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이 퇴임 직전 백악관에서 민주당의 신출내기 하원의원들을 접견했을 때 얘기다. 화제는 새 대통령 당선자인 공화당의 아이젠하워와 그의 부인의 사생활로 옮아갔다. 한두 명이 듣기에 거북한 농담을 하자 트루먼은 불같이 화를 내며 그들을 제지했다. “상대를 모욕하는 정치는 안 돼. 앞으로 자네들 중 누구하나 대통령의 부인과 가족에 대해 인신모독성 공격을 한다면 내가 직접 자네들 지역구를 돌아다니며 재선 반대운동을 펴겠네.”

▷이런 일화도 있다. 트루먼이 백악관을 떠난 지 10년쯤 된 62년 로스앤젤레스에서 대학생을 상대로 강연을 할 때다. 한 학생이 불쑥 “우리 시골 양반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물었다. 팻 브라운 캘리포니아주지사를 빗댄 말이었다. 트루먼은 대뜸 “주지사를 그렇게 못되게 부르다니 창피한 줄 알라”며 학생을 꾸짖었다. 그는 다른 질문은 받지도 않고 남을 모욕하는 행위와 언사가 어떻게 비수가 되어 자신에게 되돌아오는가를 강조했다. 그같은 대통령에게 학생은 사과했고 두 사람은 몇 년간 편지를 주고받을 정도로 친밀해졌다.

▷4·13총선을 눈앞에 두고 중앙선관위가 각 당의 인신공격이나 흠집내기 등 대표적인 비방 흑색선전 사례 126건을 선정 발표했다. “총재부인의 머리 빗겨주고 화장 고쳐주고 핸드백 들고 화장실 앞에서 기다리는…” “오합지졸의 골목대장 행세나 하는 ○총재” “양김이 탄 20세기 황혼열차는 이제 기지창으로 들어가야 할 때” 등 상대를 매도하고 근거없이 비하하는 이런 발언들이 정당의 입이라는 대변인단을 통해 마구 쏟아져 나오고 있다. 저질정치 저질선거의 표본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는 말의 폭력사례다.

▷우리를 더없이 우울하게 하는 것은 트루먼 같은 생각을 하는 정치지도자가 왜 없느냐는 것이다. 대변인단이 저질 성명이나 논평을 내도 “그건 안 된다”고 말하는 당의 어른이 없고 오히려 “잘 꼬집었다”고 부추기니 흑색선전 비방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것 아닌가. 이제라도 당 대표들이 직접 나서서 비열한 언어 폭력은 일절 사용하지 말라고 대변인단에 강력히 지시한다면 큰 박수를 받고 표도 얻을 텐데 그걸 모르고 있다니 안타깝다.

<민병욱논설위원> min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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