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80돌 특집]여성 "디지털 세상은 우리 세상"

  • 입력 2000년 3월 31일 21시 31분


《지난 세기, 미래학자와 경제학자들은 21세기가 여성의 세기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정보화시대로 요약되는 21세기는 Female(여성) Feeling(감성) Fiction(상상력)의 3F시대가 되리라는 전망이었다. 이제 21세기. 물리적 힘보다 지적 능력이 중시되는 지식기반사회에서 노동력의 성별구분은 무의미해지고 있다. 더구나 인터넷은 성별을 묻지 않는 또하나의 신대륙. 경쟁력있는 여성들에게 남녀차별이 없고 능력평가가 객관적인 정보통신 벤처기업은 기회폭발의 ‘열린 세상’이다. 이곳에서 자신의 능력을 한껏 발휘하는 여성들이 저마다의 함성을 지르고 있다. “21세기, 여성의 세기가 열렸다”고. 》

이달 중순 본격 서비스에 들어가는 건강정보 포털사이트 ‘헬시즌’(www.healthizen.com)의 유길명이사(rkmykm@healthizen.com). 지난해 여름, 아이디어 하나만을 들고 A창투사를 찾은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프리젠테이션을 하고 있었다.

“저희 사이트는 기존의 의료사이트들과 다릅니다…건강에 관심있는 분들에게 확실한 가이드가 돼 드릴 수 있는 ‘솔루션’이 있고 이를 실현시킬 수 있는 기술이 확보됐으며 구체적인 방안은…”

프리젠테이션이 끝나자 하나 둘 박수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회의실은 공연이 끝난 콘서트홀을 방불케 했다. 박수를 거두고 김모 책임심사역이 물었다.

“아주 좋습니다. 매우 긍정적으로 투자를 고려하겠어요. 그런데 유길명씨, 실례지만 지금 나이가 몇이죠?”

유이사는 그제서야 당당하게 대답했다.

“네, 19살입니다. 현재 경희대학교 한의학과 1학년이고 내년에 휴학할 계획입니다.”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에 입학, 전액장학금 유학과 교수직 보장 등을 마다하고 벤처사업을 시작한 그는 지금 20살이다.

▼'성역'은 없다▼

디지털시대의 개막과 함께 많은 장벽이 사라지고 있거나 이미 사라졌다. 벤처기업들로 대표되는 정보통신업계에서 나이 학벌 연조 등 산업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던 ‘논리’들은 자취를 찾아볼 수 없게 됐다.

이와 함께 급격한 몰락 일로에 있는 개념은 ‘성역’(性域).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가 “정보화 사회로 진입하면서 가사와 외부활동으로 나뉘는 여성과 남성의 분업관계가 사라지고, 남성의 하드웨어와 여성의 소프트웨어적 기능이 상호 협력하는 수평적 관계로 발전할 것”이라고 예상한 것과 맞아 떨어지고 있다. 철저하게 기술과 프로젝트단위로 승부하는 사회에서 같이 술마시고 목욕해야 사업이 되던 남성위주의 비즈니스 문화도 사양길로 접어들고 있다. “오히려 전문지식이 주로 요구됐던 근대에 비해 감성과 섬세함 상상력을 요구하는 정보화시대의 문화가 여성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는 게 한국과학기술원(KAIST) 최혜실교수(인문사회과학부)의 분석.

▼X세대 전문가▼

한국통신 멀티미디어연구소에서 선임연구원으로 근무하다 최근 벤처기업 ‘사이버렉트’로 자리를 옮긴 신은경팀장(29·joyshin@hanmir.com). 1995년 이화여대 전산과 대학원에 입학하자마자 인터넷 상에서 PC통신과 같이 빠른 속도로 특정 집단에 속한 사람들끼리 정보를 주고 받을 수 있는 BBS를 대학 최초로 개발, 업계의 주목을 받았다.

컴퓨터를 생활의 자연스러운 도구로 삼고 자란 N세대와 일부 X세대. 이중 특히 여성들의 ‘거미줄 사고(Web-thinking)’가 웹 기반의 ‘사이버 라이프’를 윤택하게 만든 한 예다.

신팀장은 97년부터 한국통신 컨텐츠연구실에 근무하면서 포탈사이트 한미르(www.hanmir.com)의 인터넷 지도검색서비스, 개인홈페이지 서비스 등의 솔루션을 개발했다. 신팀장 외에도 당시 연구실에 근무하던 12명 중 6명이 여성이었으며 검색서비스를 전담하는 부서의 경우 대부분이 여성이었으나 최근 들어 남성인력도 하나 둘 진입하기 시작하는 상태.

▼'미투'는 안돼▼

캐릭터 개발 임대라는 독특한 사업분야를 창조한 씨즈미디어(www.cizmedia.com). 이 곳의 핵심부서는 단연 디자인 팀이다. GIF애니메이션을 이용해 만든 가로 세로 2×3㎝정도 크기의 움직이는 귀여운 캐릭터를 E메일로 PC나 휴대전화에 보내는 서비스를 제공. 씨즈미디어의 주력상품인 캐릭터는 하루 한 개씩 새로 추가된다.

디자인팀장 이선화씨(27·shlee@cizmedia.com)등 디자인팀 15명 중 9명이 여성. 초안을 그리고 개발된 캐릭터에 표정을 부여하고, 20∼30컷의 그림파일을 연결해 동영상으로 만드는 이들의 독특한 기술은 대개 어느 한 회사가 창업을 하고 3, 4개월 뒤면 ‘미투!(Me, too!·나도!)’를 외치며 동종 업체가 생기는 서울벤처밸리의 문법을 용납치 않고 있다.

▼검은 고양이 흰 고양이▼

이 회사의 공동창업자인 박은숙이사(32·여·espark@cizmedia.com)는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라는 표현은 테헤란로쪽에서는 듣기 힘들다. 상품이 될 수 있는 뭔가를 만들 수 있다면 일손은 여성이든 남성이든 전혀 상관이 없다. 연봉과 스톡옵션 실력으로 승부하는 세계에서 군경력이 도움이 될리 없고 이는 여자도 마찬가지다”라고 했다. “인터넷 사업에서 는 여성이기 때문에 유리한 점이 많지 않느냐”고 질문한 기자가 오히려 이상스럽다는 표정이었다.

이처럼 달라지는 분위기는 꼭 디지털관련 사업이 아니더라도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 검은 고양이든 흰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되듯이, 일을 하는데 여자면 어떻고 남자면 어떠하느냐는 논리.

국내 여성 카피라이터 1호 문애란씨(47·웰컴 부사장·softorchid@netsgo.com). ‘미인은 잠꾸러기’라는 카피로 당시 70억원이던 화장품회사의 매출을 단박에 400억으로 끌어올린 그는 광고주를 만나러 갈 때면 일부러 남자 직원을 대동하곤 했다. ‘듬직해 보이기’ 위해서다. 한 번은 여성들로만 팀을 짜 한 업체 간부를 만나러 간 적이 있었는데, 광고주측이 노골적으로 “그 회사는 남자 없어요?”라고 묻기도 했다.

그러나 요즘은 바뀌는 추세다. 최근 서울벤처밸리의 A사를 찾았을 때. 차 한 잔 마시지 않고 곧장 아이디어회의를 시작한 대표이사 김모씨는 말하는 중간 중간 문부사장의 노트를 흘낏 흘낏 쳐다봤다. 꼼꼼이 모든 것을 받아적고 중요도에 따라 □☆◇○ 표시를 하는 문부사장의 방식을 주의깊게 본 김사장은 “맞습니다. 제대로 파악하고 계시는군요”라는 말로 부연설명에 필요한 10여분을 절약했다.

▼여성은 없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똑똑한 사람을 만나면 무조건 기분이 좋다”는 문부사장은 “요즘들어 광고주 회사의 여성직원들을 만나면 기분이 좋아지는 일 늘고 있다”며 흐뭇해했다. 사회적 도구적 환경이 여성에게 유리하게 만들어지고 있다는 해석에 못지 않게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를 걱정하는 전문가들도 있다. 사회생활을 하는 여성에게 족쇄로 작용할 수 밖에 없는 출산 육아 문제가 첫번째다. 디지털 시대에도 아이는 여성이 낳아야 할 것이므로.

또 사회에 진출한 여성인력 중 많은 수를 차지하는 단순 노무직 여성의 경우 산업이 소프트화하면서 오히려 컴퓨터에 일자리를 빼앗겨 전체 여성활동 인구 수는 줄어들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게다가 우리나라의 사회문화적 토양이 여성의 사회생활에는 적합지 않다는 지적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삼성경제연구소 유석진수석연구원은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의 1999년 세계경쟁력 보고서 여성차별 부문에서 조사대상 47개국 중 우리나라는 45위로 평가됐다”고 지적한다. 디지털시대가 도래했음에도 여성에게 주어진 짐은 여전히 여성 각자가 해결해야 하는 상태. 이 때문에 우리 사회 각분야에서 여성성이 꽃을 피울지, 여자는 계속 꽃으로 남을지는 좀더 두고봐야 한다는 지적이다.“UN개발계획이 발표한 여성권한척도에 따르면 한국여성의 정치 경제적 지위는 102개국 중 83위,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IMD)의 1999년 세계경쟁력 보고서 여성차별부문에서 조사대상 47개국 중 우리나라는 45위로 평가됐다”며 “결혼정보회사 듀오의 조사에서 4명 중 3명꼴로 ‘아내가 성공한다면 전업주부(主夫)가 되겠다’고 답한 남성들의 바램과 이같은 현실 사이에는 다소 거리가 있다”고 말했다. 문부사장도 “솔직히 자녀 교육에는 충분히 정성을 쏟을 수가 없었다”고 고백한다. 남편 이 살림과 자녀교육의 절반을 가져가 주지 않았더라면 회사를 그만뒀을 정도로 ‘여성의 역할’을 여자 혼자 감당하기 힘들다는 것. 디지털시대, 경쟁력있는 젊은 여성들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성에게 주어진 짐은 여전히 여성 각자가 해결해야 하는 상태. 이 때문에 우리사회 각분야에서 여성성이 꽃을 피울지, 여자는 계속 꽃으로 남을지는 좀더 두고봐야 한다는 지적이다.

▼씨즈미디어 박은숙이사, 새벽 인터넷으로 뉴스체크▼

“내 몸속에 ‘벤처DNA’가 있다.”

지난해 6월 출범한 씨즈미디어의 창립멤버 박은숙이사(32·espark@cizmedia.com)의 하루는 숨가쁘다. 외국어대 독일어과 86학번으로 졸업과 동시에 정보통신 전문지 기자생활을 시작, 벤처기업의 시작부터 최근까지 이 ‘바닥’에 대한 감을 키웠다. 무엇보다 중요한 재산은 “그동안 내가 뭘 잘 할 수 있고, 뭘 못하는지를 파악하는 데 성공한 것”.

오전 6시 기상. 서울 서초구 양재동 집에서 눈을 뜨는 즉시 길 건너편 ‘단학선원’으로 향한다. 1시간 동안 단전 호흡. 집에 와서 인터넷으로 후버스 산호세머큐리 ZD넷 월스트리스저널 포브스 등 20여개의 신문 잡지를 보면서 2시간 동안 그날의 뉴스를 체크한다.

출근은 오전 10시. 그날의 일정을 체크하고 곧바로 외부 업체와 미팅을 시작한다. 회사 직원들끼리는 따로 회의를 하지 않는다. 회의 통보를 하고, 모이고, 차마시는 동안 ‘적’들은 한 발 앞서가고 있을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요즘은 사업 초기여서 인터넷 포털사이트와 무선인터넷업체 등 하루 5,6군데를 찾아다니며 전략적 제휴를 맺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오후 6시경에 서울 강남구 역삼동 회사에 들어와서 PC를 켜고 E메일 체크. 600∼700통의 E메일에 대해 중요도에 따라 저장을 하고 필요할 경우 답장을 쓴다. 요즘은 캐릭터메일을 인터넷에서 보고 사업문의를 하는 외국 업체의 문의가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7시경 식사후 오늘 미팅 결과를 정리하고 사업진행 상황을 파악한 뒤 내일 계획을 짠다. 만나야 할 업체와 준비 자료 등을 챙기고, 사업전략 기획을 하다 보면 이르면 새벽 1시 늦으면 새벽 4시에 퇴근. 그는 기혼여성이다.

“인터넷 사업에서는 여성이기 때문에 유리한 점이 많지 않은가?”하고 묻는 기자에게 박이사는 잘라 말했다. “실력으로 승부하는 세계에서 ‘여성이기 때문에’란 있을 수 없습니다.”

<나성엽기자> news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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