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는 새천년]'국경없는 경제시대'의 국가?

  • 입력 2000년 3월 15일 19시 21분


“세계 경제가 ‘국경없는 경제(Borderless Economy)’시대로 나아가면서 국가의 역할이 줄어들 것으로 일반적으로 예측됐다. 그러나 지난 10년간의 통계에 따르면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정부지출의 비중은 오히려 늘어났다.”(삼성경제연구소 홍순영 연구위원)

상품과 자본, 지식, 노동의 국제적 이동을 막아 온 장벽, 즉 국경이 조만간 사라질 것이라는 예측이 난무했던 게 사실이다. 일부 미래학자들은 한술 더 떠 국경이 없어지면 국가 또는 정부도 사라질 것으로 보기까지 했다.

이들 학자들에겐 참으로 유감스런 일이지만 국가의 역할은 오히려 나날이 강화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일군의 경제전문가들은 국경의 문턱이 낮아짐에도 불구하고 국경 자체는 영원할 것이란 주장까지 펴고 있다. 비교역적 특성을 갖는 노동 환경 등의 문제가 남아 있는 한 생산요소의 자유로운 이동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다만 상품과 자본 분야에서 이미 ‘국경’이 특별한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됐고, 지식과 정보 분야에도 인터넷혁명이 불어닥치면서 ‘국경없는 경제’가 앞당겨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정보를 차단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마당에 어떻게 국경이라는 장벽이 독야청청 할 수 있겠느냐는 얘기다. 전자상거래가 어느 정도나 상품교역을 대체하느냐가 국경의 존립 여부를 결정할 것이라는 예측도 있다.

이렇게 국경이 있든 없든 앞으로 모든 생산요소들은 과거보다 좀 더 자유롭게 세계시장을 누비고 다닐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일치된 분석이다. 이런 상황에서 특정한 국경 안의 생산요소를 관리하고 지배해 온 국가의 역할은 바뀔 수밖에 없다. 변화하지 않는 국가란 곧 세계경제와의 교류를 끊는 셈이고 이는 세계 최빈국으로의 전락을 의미할 뿐이다.

홍순영 연구위원은 “‘국경없는 경제’시대에도 사회를 보호하고 기업을 유치하려면 국가가 적극 나설 수밖에 없다”며 국가의 역할은 더욱 강화될 것이란 전망을 내놓는다.

한국경제연구원의 이수희 거시경제연구실장도 “경제활동 자체는 분명히 국경이 없어지는 방향(Borderless)으로 가고 있지만 국가의 역할은 더욱 커질 것”이라고 진단한다. 다만 국가의 역할은 과거와 많이 달라질 것으로 본다. 국가가 과거처럼 자원을 동원하고 배분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여건을 개선하는 일에 매달리게 될 것이라는 얘기다.

국경없는 경제시대엔 기업이 국가를 선택하기 때문이다. 기업은 가장 유리한 조건을 제시하는 국가에 본사를 두고자 한다. 현대와 삼성그룹도 본사를 아일랜드에 둘 수 있다.

재정의 원천을 사실상 기업에 두고 있는 국가의 입장에서는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기업 유치에 나설 수밖에 없다. 궁극적으로는 국가가 서로 경쟁하는 하나의 경제단위로 바뀔지도 모르는 일이다.

한국경제연구원의 좌승희 원장은 “국민경제의 경쟁력은 상대적으로 이동성이 낮은 생산요소와 자원의 양과 질을 얼마나 확보할 수 있는가, 그리고 이동성이 강한 자원중 우수한 자원을 얼마나 많이 국내에 유치할 수 있는가에 따라 결정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살아남으면서도 새로운 환경에 걸맞는 새로운 기능을 요구받는 정부의 미래상은 무엇인가.

자원배분 측면에서는 지금과 같은 개입위주가 아니라 유수의 자원을 유치하기 위해 국내의 경제활동 여건을 개선하고 관리하는 질서 및 제도정책 기능으로 전환할 것으로 보인다. 이동성이 약한 생산요소인 국내경제제도, 관행, 사회간접자본 등을 선진국 수준으로 확충하고 이동성이 높은 기업전문인력의 활동여건 역시 선진국 수준으로 향상시켜야 한다는 것.

경제정책에 있어서도 거시경제의 기조는 계속 안정될 뿐 아니라 앞으로 더욱 강화돼야 한다는 게 좌 원장의 주장이다. 거시경제의 안정이란 시장질서에 보다 나은 외생적 환경을 제공하는 것이기 때문. 미시정책은 과거의 가격과 수량규제, 진입제한 등을 완전히 철폐하고 공정한 경기규칙이 유지되도록 간접적 개입에 머물러야 한다는 분석이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국경없는 단일시장으로의 전환’은 궁극적으로 각 정부의 산업정책을 폐기하도록 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최적의 산업조직은 민간부문의 자생적인 적응노력에 의해 형성되는 만큼 정부의 의해 그려질 수는 없다는 것.

그런 가운데 국가가 과거에 해 왔던 기능중 상당수가 비정부기구(NGO)와 기업으로 넘어갈 것이란 전망도 있다. 과거 정부가 했던 소비자보호 문제는 이제 NGO의 몫이다. 게다가 소비자운동은 국제적으로 연계되면서 다국적화하고 있다. WTO 뉴라운드를 좌절시킨 것도 이들 NGO다.

과거의 국가 기능 가운데 다국적기업으로 넘어간 것도 있다. 정부보증 아래 해외에서 국내로 들어오던 자본을 이제는 기업이 자기신용으로 빌려오게 된 것이다.

국경없는 경제는 결코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16세기에도 19세기말에도 국경없는 경제의 경향은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상황은 과거와 분명히 다르다. 외환시장에서는 매일 1조5000억달러가 거래되고 전세계에서 산출되는 재화와 서비스의 20%가 무역을 통해 국경을 넘고 있는 것.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의 왕윤종 거시경제실장은 “국제무역기구(WTO) 뉴라운드회의가 비정부기구의 반대로 실패한데서 보듯 국경없는 경제로의 전환이 반드시 순탄한 것만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단순한 상품 이외에 여러가지 비교역적 특성을 갖는 환경 노동 등의 현안이 중요한 이슈로 부각되면서 국경없는 경제의 피해집단이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는 것. 여기서 정부의 리더쉽이 절실하게 요청되지만 주요 선진국조차 이익집단들 간의 정치적 관계 때문에 리더쉽을 제대로 발휘하기가 쉽지 않다.

금융위기 이후 자본자유화에 대해서도 많은 사람들이 문제점을 제기하고 있다. 자본을 자유화하려면 그 절차가 질서있고 순차적이어야 한다는 얘기다. 자본자유화가 준비되지 않은 나라들에 얼마나 큰 희생을 강요하는지도 봐야 한다는 것.

그런가 하면 노동분야는 선진국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개방하지 않고 있다. 못사는 나라 사람들이 잘사는 나라로 이민가고 싶은 것은 당연한 일. 하지만 이민에 대한 사회적 갈등을 우려한 선진국은 노동분야의 국경을 튼튼히 쌓는 추세다.

이와 관련해 왕실장은 “무분별한 자유화는 새로운 문제를 낳는다”며 “강력하게 추진되고 있는 국경없는 경제로의 전환에도 일정한 규제가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국경없는 경제시대로의 이동이 양극화 문제를 심화시키고 있다는 비판도 있다. 세계인구의 20%를 점하는 부국(富國)과 최하위 20%를 차지하는 빈국(貧國) 간의 소득격차는 97년 74대1에 달했다.

세계 최대 갑부 200명은 98년 1조달러를 보유하고 있으며 최상위 3인이 보유한 재산은 극빈국 6억 인구의 국민총생산보다도 많다.

이렇게 국경의 문턱이 낮아지면서 소득분배의 격차를 해소하고 경제여건을 개선하기 위해선 국가의 역할이 오히려 강화돼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그래서 21세기에도 국가는 여전히 중요한 경제단위로 남게 되며 그 기능도 특정분야에서 오히려 강화될 것이라는 전망이 아직은 우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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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 노동 자본 정보가 국경을 완전히 자유롭게 넘나드는 경제. 2차대전 이후 국제사회가 관세무역일반협정(GATT), 우루과이라운드(UR), 세계무역기구(WTO) 등을 통해 일관되게 추진해 온 사항이다.

경제분야의 국경은 우선 ‘상품’ 분야의 수입규제와 관세를 들 수 있다. WTO는 궁극적으로 이같은 규제와 관세를 모두 철폐하고자 한다. ‘자본’은 비교적 자유롭게 국경을 넘나든다. 반면 ‘노동’의 자유로운 이동은 선진국의 반대로 아직 어려운 형편. 이민에 대한 사회적 갈등을 우려한 탓이다. ‘정보’는 인터넷혁명으로 국경의 의미가 희박해지고 있다.

완전한 형태의 ‘국경없는 경제’의 실현은 상당기간 어렵겠지만 그같은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궁극적으로 보자면, 실물교역과 관계된 관세 비관세장벽이 모두 사라지면서 교역에 있어서 국경은 의미가 없어진다는 것. 금융분야의 국경도 사라지고 있으며 자본거래에서 국경은 이미 거의 의미가 없다. 해외자본 직접투자도 신고 정도여서 사실상 개방된 셈이다. 앞으로 남게 될 ‘국경’은 토지와 그 토지에 소재한 기업의 생산활동 정도일 것이고 그에 대해 부과되는 세금과 고용만 의미를 가질 것 같다.

<임규진기자> mhjh22@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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