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신금덕/인플레 징후 심상찮다

  • 입력 2000년 3월 9일 19시 47분


최근 몇 년 동안 미국은 고성장을 거듭했으나 인플레 징후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이러한 현상을 기존 거시경제이론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해 ‘새경제(New Economy)’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새경제의 핵심은 경제의 세계화, 강력한 구조조정, 정보통신의 기술혁신으로 인플레를 동반하지 않는 고성장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인플레를 이제 식어버린 휴화산에 비유하는 경제학자도 있다.

그러나 인플레에 대한 우려가 완화된 것을 인플레의 소멸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미국의 저물가 기조는 세계화와 정보통신의 기술보다는 정책 당국의 시의적절한 조치에 힘입은 바가 더 크다.

인플레가 나쁘다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무엇보다도 미래가격에 대한 불확실성을 초래해 자원배분을 왜곡시킨다. 소비 저축 투자에 대한 결정이 비합리적으로 이루어져 전체 경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저축보다 소비를 부추겨 과소비를 조장하고 투자를 부동산과 같은 비생산적인 곳으로 유도해 거품을 키운다.

그 뿐만 아니라 인플레는 채권자로부터 채무자에게로 소득과 부를 재분배한다. 금융기관에 대한 기업들의 만성적인 과다차입을 초래해 경제위기의 한 원인이 되기도 한다. 특히 서민들이 인플레로 받는 상대적인 박탈감의 정도는 훨씬 더 크다. 그들의 저축을 약탈해가는 주범이기 때문이다.

인플레는 한 번 발생하면 치료하기가 무척 힘들다. 그래서 치약에 비유하기도 한다. 일단 튜브 밖으로 빠져나오면 다시 집어넣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따라서 한 번 발생한 인플레를 억제하는 데는 엄청난 사회적 비용이 수반된다.

우리나라도 이 점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60, 70년대에는 고도성장이 안정을 압도한 시대였다. 이로 인해 초래된 인플레 망령이 미래에 얼마나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할지 그 중요성을 주지시킨 경제학자는 별로 없었다. 그로부터 20년 정도 경과한 97년 말 우리는 외환위기라는 뼈아픈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물론 외환위기를 초래한 원인은 여러 가지를 들 수 있으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고비용 저효율의 경제구조가 심화하면서 경쟁력이 저하됐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조 정착에 만성적인 인플레가 크게 기여한 것은 사실이다.

이같은 부정적인 요인들 때문에 선진국은 인플레 압력의 징후가 포착되기만 하면 고통스럽지만 과감한 금융긴축을 실시한다. 지난해 미국은 인플레 징후가 나타나지 않았지만 선제적인 차원에서 세 차례의 금리인상을 단행했고 올 들어서도 2월에 이어 3월에도 추가적인 금리인상이 확실시되고 있다.

한국 경제는 지난해 이후 고성장을 보이면서 수요와 공급 양 부문에서 인플레 압력이 커지고 있다. 그 동안 구조조정이라는 명목하에 너무 느슨했던 통화정책과 유가를 비롯한 국제 원자재 가격의 급상승이 본격적으로 물가상승에 반영될 것이다. 특히 최근 정부의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3·4분기에 3년 만에 임금상승률(11.5%)이 노동생산성(10.7%)을 상회한 것으로 나타나 물가상승으로 이어질 소지가 크다.

더구나 총선정국을 앞두고 어수선한 사회분위기를 틈타 개인서비스 업체들이 요금을 올리고 있고 채소류 가격이 급등해 서민들이 느끼는 체감물가의 상승속도는 가파르다. 반면 정부가 발표하는 물가통계는 매우 안정적이다. 이처럼 정부의 물가통계가 체감물가에 비해 너무 과소평가돼 있는 점을 고려할 때 실제 물가는 훨씬 높을 수도 있다.

한국은행도 이런 점들을 우려해 2월 0.25%포인트 금리인상을 단행했다. 그러나 그 정도 금리인상은 우리 경제의 제반 여건을 고려할 때 향후 물가상승 압력을 잠재우기에 역부족일 것으로 생각된다.

인플레 망령이 주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특히 안정의 최종 책임자인 한국은행은 경고의 메시지로 받아들여야 한다. 한국은행이 정부의 지나친 낙관론에 동조하게 되면 그 대가는 만성적인 인플레 기대심리를 조장하는 것이다. 이는 또다시 고비용 저효율 경제구조를 재현시켜 제2의 경제위기를 향한 씨를 뿌리는 것이다.

신금덕 (외환은행경제연구소 국제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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