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타임스/Arts]美 PBS방송 특집 '엘리너 루스벨트'

  • 입력 2000년 1월 11일 22시 22분


《엘리너 루스벨트의 숭배자들은 그녀가 천국의 선물이며 짓밟히고 학대받은 사람들을 위해 행동한 굳건한 대변자였다고 말한다. 반면 비판자들은 그녀가 위험한 참견꾼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비판자들도 그녀가 30년이 넘게 미국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을 지닌 여성이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그녀의 숭배자들과 의견을 같이한다.》

10일 저녁 9시에 PBS는 다큐멘터리 ‘엘리너 루스벨트’를 방송했다. 두 시간 반 짜리인 이 다큐멘터리의 공동 제작자인 캐트린 디츠는 이 프로그램이 ‘용감하고, 완고하고, 정열적이고, 관대한 여성이었던 엘리너 루스벨트를 새로운 학문적 관점에서 재발견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말했다. PBS의 다큐멘터리는 엘리너에 대해 다양한 시각에서 접근하면서 때로는 기민한 정치가이고 때로는 감정적으로 억압된 여성이었던 그녀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앞으로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정치 전문가들은 그녀를 ‘루스벨트 가문 최고의 인물’로 꼽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 것도 흠잡을 것이 없는 이 가문에서 그녀의 인생은 불운하게 시작되었다. 1884년 10월 11일에 뉴욕시에서 엘리엇 루스벨트와 안나 홀 루스벨트 부부의 딸로 태어난 엘리너는 수줍음을 잘 타는 못생긴 소녀로서 아름다운 어머니에게 저주와도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그녀는 매력적이지만 알코올 중독자였던 아버지의 애정에서 위안을 찾으려고 했다.

1892년에 안나가 디프테리아로 세상을 떠나자 엘리너는 두 남동생과 함께 외할머니 집으로 보내졌다. 외할머니는 종교적인 규율을 엄격하게 지키는 여성이었으며 아버지 엘리엇은 가끔 아이들을 보러 들를 뿐이었다. 그나마 얼마 지나지 않아 엘리엇이 병원에 입원하게 되고 1894년에 세상을 떠나버리자 당시 열살이었던 엘리너는 비탄에 빠진 고아가 되었다.

엘리너는 15세 때 여성주의자인 마리 수베스터가 운영하는 런던 외곽의 기숙학교 앨런스우드에 입학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비로소 자신이 발을 디디고 설 자리를 찾았다. 그녀는 후에 이곳에서 보낸 3년이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기간이었다고 회고했다. 학생들이 가장 좋아하는 친구에게 꽃다발을 보내는 주말이 되면 엘리너의 방은 정원처럼 변해버리곤 했다.

1902년에 뉴욕으로 돌아왔을 때 엘리너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키가 크고 날씬한 몸에 유럽식 옷을 입은 그녀는 세련되고 귀족적인 모습이었다. 이제 자신감이 넘치는 활동적이고 행복한 사람으로 변모한 그녀는 사교계에 공식적으로 데뷔했다. 이때 그녀에게 눈길을 준 사람 중에 그녀의 먼 친척인 프랭클린 델라노 루스벨트가 있었다. 엘리너는 이 위세 당당한 미남과 비밀리에 약혼을 한 후 1905년에 삼촌인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주재로 우아한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결혼에 대한 꿈은 곧 쓰디쓴 절망으로 바뀌었다. 1916년까지 엘리너는 6명의 아이를 낳았는데 그 중 한 명을 아기 때 잃었다. 엘리너는 부드러운 태도로 친구들을 대했지만 어머니 안나처럼 어머니이자 아내로서는 종종 차갑고 정이 없는 태도를 보였다. 게다가 그녀는 간섭이 심한 시어머니와 불화에 시달리고 있었다. 시어머니는 엘리너 부부의 옆집에 살면서 손자들이 자신을 ‘진짜 어머니’로 생각해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리고 마침내 1918년에 남편 프랭클린이 비서인 루시 머서와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 엘리너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한 절망을 맛보았다.

PBS의 다큐멘터리는 그 일이 있은 후 프랭클린과 엘리너가 다시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로 돌아가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이 같은 주장의 근거가 되는 것은 두 사람이 가졌다고 추정되는 혼외 관계이다. 프랭클린은 나중에 비서인 미시 르핸드와 관계를 맺었으며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는 머서와 다시 가까워졌다. 그리고 엘리너는 AP 통신 기자인 로레나 히콕, 뉴욕주 경찰관인 얼 밀러와 각각 관계를 맺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언론이 대중적인 인물의 사생활에 비교적 관심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프랭클린이 뉴욕 주지사와 대통령을 지내는 동안 미국인들의 상상력을 사로잡은 것은 정치가로서의 엘리너였다. 민권운동 지도자인 제임스 파머는 엘리너가 “양심에 따라 행동했고 양심에 따라 말했다”고 했으며 국무장관 존 포스터 덜레스는 그녀가 “모스크바보다 더 파괴적이고 위험했다”고 했다. FBI 국장인 에드가 후버도 덜레스와 생각을 같이했다.

그는 엘리너에 대해 무려 3000페이지나 되는 자료를 수집했는데 이는 한 인물에 대한 자료로서는 역사상 가장 방대한 분량이었다.

그러나 엘리너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공적인 활동에 나선 여성들은 모두 피부를 코뿔소의 가죽처럼 튼튼하게 단련할 필요가 있다”고 썼다. 그녀는 의회 위원회에서 증언을 하고, 기자회견을 열고, 전국 당대회에서 연설을 한 최초의 대통령 부인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신문에 연재한 칼럼을 통해 때로는 남편이 속한 당의 정책에 노골적인 반대의사를 표명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950년대에 인종차별 단체인 큐 클럭스 클랜(KKK)이 그녀의 목에 현상금을 걸었을 때는 친구와 함께 차를 몰고 일부러 남부를 횡단하기도 했다. 그 차의 앞좌석에는 권총이 놓여 있었다.

엘리너는 1945년에 프랭클린이 세상을 떠난 후 유엔주재 미국 대사로 활동하다가 뉴욕의 집에서 말년을 보냈다. 나이가 들어 많이 부드러워진 그녀는 손녀들에게 훌륭한 할머니로 기억되고 있다. 엘리너의 막내아들 존의 딸인 니나 루스벨트 캠벨은 “할머니는 신념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용기를 지닌 분이셨다”면서 “할머니가 하신 일들은 모두 이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http://www.nytimes.com/yr/mo/day/artleisure/tv―roosevelt.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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