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는 내 친구]여자축구 심판 꿈꾸는 홍은아씨

  • 입력 2000년 1월 5일 20시 00분


나(홍은아·20·이화여대 체육학부1)는 학우들 사이에서 ‘괴짜’로 통한다. 내 꿈이 축구심판이기 때문이다. 왜? 하고 싶으니까.

난 어려서부터 남자들 틈바구니에서 볼 차는 게 좋았다.‘선머슴’이었다. 그러다 서이초등학교 2학년때 축구와 ‘절교’했다. 여자는 다소곳해야 한다는 ‘사회기준’을 받아들인 것이다.

우리 가족은 96년1월 뉴질랜드 이민비자를 받았다. 국내 일을 정리해야 하는 부모님과 떨어져 난 먼저 뉴질랜드로 떠나 주민 3000명의 조그만 도시 휘티잉가에 도착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넓고 푸른 잔디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어릴 적 축구하던 추억이 되살아났다.

3월 랭귀지스쿨을 마치고 고1로 입학한 머큐리베이 에이리어 스쿨은 매주 수요일 오후를 ‘스포츠 데이’로 지정, 학생들을 마음껏 뛰어놀게 했다.

나는 뒤도 안보고 축구장으로 달렸다. 남학생들과 뒹굴며 볼을 차는 기분이란…. 여학생이 4명 정도 있었지만 나는 그곳에서도 ‘특이한 여학생’이었다. 학교 축구클럽에도 가입했다. 주말마다 펼쳐지는 학교 대항전에 참가, 덩치 큰 뉴질랜드 남학생들과 부딪쳐도 넘어지지 않고 신나게 공을 찼다.

축구를 빼면 뉴질랜드의 1년은 눈물로 지샌 나날이었다. 가족과 떨어져 홀로 지낸 시간은 너무 힘들었다. 결국 97년1월 부모님이 이민 포기를 결심하셨고 나는 은광여고 2학년으로 복학했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폭탄선언’을 했다.

“체대에 가겠어요.중1때 결심한 거예요.” 무남독녀가 운동을 하겠다니….어머니(최경숙·48)는 펄쩍 뛰었다. 그러나 자식을 이길 부모는 없었다. 나는 2학년 여름방학 때부터 체대진학을 위한 실기연습에 집중했다.

친구들을 ‘꼬여’ 5대5 미니축구를 하는 것으로 축구에 대한 향수를 달래던 나는 지난해 대학에 들어갔다.‘이젠 진짜 축구를 해야지!’라고 작심하고 지난해 4월 문을 연 축구해설가 신문선씨의 ‘마포구 여성축구교실’에 참가했다.

99미국 여자월드컵은 나로 하여금 여자축구의 매력에 푹 빠뜨렸지만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대한축구협회 홈페이지에 ‘여자축구를 살리자’라는 글을 띄웠다. 하지만 조회수가 ‘0’에 가까울 만큼 사람들은 냉담했다. 반응은 ‘엉뚱한’ 곳에서 왔다. PC통신 하이텔 축구동아리 ‘축구클론’에서 같이 축구를 하자고 제안이 왔고 지난해 11월부터 일요일마다 서울 약수동에서 뉴질랜드에서 갈고 닦은 실력을 마구 뽐내고 있다.

지난해 12월 대한축구협회가 신임심판강습회를 열기 직전, 신청서를 내며 장문의 글을 협회에 보냈다.

“심판이 되겠다는 것은 충동적 결정이 아닙니다.꼭 기회를 주십시오.”

협회는 요청을 받아줬고 요즘 오후 3시만 되면 이화여대 운동장을 달린다. 2월 심판테스트가 있어서다. 50-200-50-200m를 번갈아 달려야 하고 2.4㎞를 12분안에 뛰어야 한다. 통과하면 3월부터는 협회의 3급심판이 된다. 사람들은 왜 심판이 되려느냐고 묻는다.대답은 간단하다.

“22명을 내려다보는 위치가 얼마나 좋아요.”

그렇다고 전임심판이 될 생각은 없다. 전임이 되면 즐길 수가 없어서다. 축구는 나에게 하나의 사는 즐거움일 뿐이다.

<정리=김호성기자>ks101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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