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천년 대담]촘스키/富-권력독점 방지가 21세기 숙제

  • 입력 2000년 1월 4일 20시 2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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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하는 가장 중요한 지식인’, ‘현대언어학의 창시자’, ‘가장 예리하고 끈질긴 사회비평가’. 촘스키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1000편 이상의 논문을 발표하고 80여권의 저서를 펴냈으며 세계 유수의 대학과 기관으로부터 수많은 명예학위와 상을 받았다.

언어학 패러다임을 전환시킨 ‘언어이론의 논리구조’(1955)로 언어학 혁명을 일으킨 이래, 1964년 베트남 반전데모로 세상의 주목을 받았고, 1966년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지식인의 책무’를 통해 일약 세계적 스타로 발돋움했다.

‘변형생성문법’으로 알려진 그의 언어이론이 1980년대 ‘지배-결속이론’으로 발전하면서 세계 언어학계를 사로잡고 있는 동안, 촘스키는 미국의 개입주의적 외교정책의 야만성을 신랄하고 끈질기게 폭로하는 등 지식인으로서의 발언을 계속해 왔다. 그는 플라톤-데카르트의 이성주의에 젖줄을 대고 있으며, 루소 훔볼트 오웰 등의 사상적 영향 아래서 ‘자유주의적 사회주의자’로 자임해 왔다. 버트런드 러셀과 존 듀이의 행동주의적 면모를 흠모한다고 공언한다.

최근에도 ‘최소주의’라는 자신의 언어이론을 심화시키는 한편 세계 도처에서 강연을 통해 신자유주의 세계질서의 본질과 폐해를 파헤치고, 코소보나 르완다의 인권유린을 고발하는 등 전방위적으로 활동중이다. 강대국의 인권유린이 자행되는 곳이면 남아공이건 니카라과건 현장을 찾아 그 실상을 고발하는 그의 투쟁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장영준 교수〓 현대언어학의 창시자이자 사회비평가로서 지난 45년간 질풍노도의 삶을 이어온 교수님의 지난 세월을 개인적으로 어떻게 회고하십니까.

▽촘스키 교수〓 그것은 개인적 성취가 아닙니다. 우선 언어학은 45년 전의 모습을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본질적인 변화를 겪었습니다. 오늘날 10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던 주제들이 연구되고 있습니다. 놀라운 변화입니다. 정치적인 면에서는 60, 70년대의 사회가 좀더 문명적이었다고 해야 할 정도로 신자유주의가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해 강력하게 도전해오며 점차 공격의 강도를 높여오고 있어요.

▽장영준〓 20세기는 야만적 전쟁, 전체주의 실험, 인권유린 등으로 점철된 역사의 실험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이런 경험으로부터 어떤 교훈을 얻어야 하겠습니까.

▽촘스키〓 그것은 19세기의 교훈과 다르지 않습니다. 구체적으로는 다를지 모르나, 전반적으로는 같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예를 들면 르완다 학살에 대해 자세한 유엔 보고서가 있습니다. 미국은 이런 학살로부터 자신의 책임과 관련한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 중의 한 가지는 국가의 통제를 견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국민이 국가 권력을 제한할 수 있어야 국가의 폭력적이고 비인도적인 행동도 견제할 수 있습니다. ‘국민의 참여’가 한 가지 방법일 겁니다.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입니다.

▽장영준〓 그러나 초국적 기업들은 여전히 ‘테크노피아’를 노래하는 반면 많은 지식인들은 ‘초(超)위기’에 대해 우려하는 게 오늘의 현실입니다. 이런 그로테스크한 현상에 비추어 21세기의 가장 시급한 과제는 무엇입니까.

▼ 核무기 위협 갈수록 커져 ▼

▽촘스키〓 인류가 파멸로 치달을 수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핵무기나 다른 대량 살상무기의 위험성은 더욱 증대하고 있습니다. 코소보의 폭격이 핵 확산의 위험성을 증가시킨데다 미국이 핵무기확산금지조약에 서명하기를 거부한 것은 인류파멸의 위험성을 더욱 높이고 있습니다. 환경 파괴 역시 인류 파멸의 수준에 이르렀고 지금도 그런 방향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당장 해결해야 할 시급한 과제도 있습니다. 아프리카에는 에이즈로 인해 400만명, 곧 4000만명이 될지도 모르는 고아들이 있습니다. 여기에 어떤 조치가 취해지고 있습니까. 없습니다. 의약품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전세계에서 엄청난 인구가 기아에 허덕이고 수백만명의 여성들이 간단한 의료혜택을 받지 못해 출산 과정에 죽어가고 있습니다. 또 가장 부자나라인 미국에서도 약 3000만명이 배고픔을 겪고 있습니다. 빈부격차의 해소는 가장 시급한 과제입니다.

▽장영준〓 한국에서도 신자유주의를 해부한 교수님의 저서가 최근 번역됐습니다만 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거세지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일까요.

▽촘스키〓 지난 20∼25년 동안의 사회정책이 경제법칙보다는 부와 권력을 소수에게 집중시키는 국가정책에 의해 움직여 온 결과 극소수만이 동화(童話) 같은 번영을 구가하고, 나머지 대다수는 가난한 잉여인간으로 살아가게 됐습니다. 극도의 빈부격차가 생긴 거지요. 이는 결코 우연한 결과가 아니고 정치적 결정에 의해 고안된 것입니다. 소위 신자유주의라는 괴물이지요. 우리는 이것을 막아야 합니다.

▽장영준〓 신자유주의의 물결을 어떻게 막을 수 있습니까.

▼ IMF는 신자유주의 하수인 ▼

▽촘스키〓 먼저 신자유주의 담론에는 엄청난 속임수가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시장원리가 가난한 사람들에게만 선택적으로 적용되고 초국적 기업은 원칙을 따르지 않습니다. 부유한 특권층은 공적 자금의 지원을 받고 비용과 위험부담은 모두 사회로 이전됩니다. 국제통화기금(IMF) 같은 금융기관이 이런 것을 가능하게 하고 있습니다. IMF는 외환위기에 처한 나라들을 ‘구제’한다고 주장했지만 사실은 투자가들을 구제한 것이고, 해당 국가의 국민에게 극심한 비용을 전가함으로써 은행가와 투자가들만 이익을 보게 했습니다. 그 대안의 한가지는 누구든 시장원리에 복종하게 하는 것이지만 부자들이 그걸 받아들이지 않겠지요. 따라서 모든 사람들이 시장원리를 받아들이도록 사회적으로 강제해야 합니다. 여러가지 방안이 강구될 수 있을 겁니다.

▽장영준〓 한국과 말레이시아는 1997년의 외환위기로 IMF 구제금융을 받는 과정에서 서로 다르게 대응했습니다. 한국은 IMF의 가혹한 요구조건들을 수용한 반면 말레이시아는 IMF의 요구사항을 거부했지요. 두 나라 모두 외환위기를 벗어난 것으로 평가되는데 이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촘스키〓 한국 국민이 아니라 국제 투자가들이 구제된 것이지요. 한국 국민은 가혹한 구조조정 프로그램으로 인해 고통을 당했어요. 은행가와 투자가들의 이익을 보장하는 사회적 비용을 한국민이 떠안은 셈이지요. 말레이시아는 자본의 국외 유출을 통제함으로써 경제학자들의 비난을 초래했지만 결과는 딴판이 되었지요. 한국의 경제는 매우 빠른 속도로 회복되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이제 누가 한국을 소유하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30년 이상 노동자들의 피와 땀으로 이룩한 기업과 재산이 싼값으로 외국인에게 팔려나갔습니다. 말레이시아의 경우에 이런 문제는 생기지 않았지만 한국과 말레이시아는 기본적으로 상이한 경제기반을 갖고 있기 때문에 단순비교는 무리입니다.

▽장영준〓 최근 시애틀의 세계무역기구(WTO) 회의에서 비정부기구(NGO)의 역할이 강력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NGO의 역할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촘스키〓 맞습니다. 비정부기구의 역할이 매우 강력해졌습니다. 다자간 투자협정(MAI)은 지난 3년간 비밀리에 진행됐기 때문에 아무도 그 실체를 몰랐습니다. 자료공개를 거부해오다가 기업계가 책자를 발간하게 되었고 언론이 뒤를 캐기 시작했습니다. 언론도 침묵을 지키다가 마침내 풀뿌리 시민단체들에 의해 인터넷을 통해 공개됐습니다. 재원도 없고 언론의 지원도 받지 못했지만 인터넷을 통해 상호 연결된 풀뿌리 조직들이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하고 권력이 집중된 집단으로 하여금 후퇴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놀라운 일이지요.

▽장영준〓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몇몇 독과점 사기업이 인터넷과 같은 기본적인 소통수단을 지배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면 어떤 사회적 문화적 결과가 초래되겠습니까.

▽촘스키〓 공공의 창의에 의해 만들어진 인터넷이 1995년 마이크로소프트와 같은 사기업에 사실상 장악됐습니다. 엄청난 선물이지요. 어떻게 이런 공공재가 사기업의 손아귀에 들어갔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모든 결정이 암암리에 이뤄졌음은 물론입니다. 사기업은 권력을 다원화하고 민주주의를 신장시키는 도구로 인터넷이 사용되는 것을 막으려 합니다.

▽장영준〓 인터넷이 대안적 매체가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까.

▼ 인터넷의 이중성 경계를 ▼

▽촘스키〓 그렇습니다. 다자간 투자협정이 무산된 것도 인터넷 덕분이지요. 시애틀에서의 성과도 마찬가집니다. 이미 언급했듯이 동티모르에서의 만행에 대해 수많은 저항과 데모가 있었습니다. 인터넷이 등장하면서 산발적이고 개별적인 저항그룹과 데모가 조직화되고 대규모로 전개됐어요. 인터넷이 없었다면 멕시코의 사파티스타 농민군은 미국의 지원을 받는 멕시코군에 단 5분만에 몰살됐을 겁니다. 그들은 멕시코뿐만 아니라 국제사회로부터 충분한 정보와 지지를 이끌어냈고 멕시코 정부군은 후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인터넷은 이중적입니다. 어떤 목적에 이용하느냐에 따라 다르지요. 부정적인 측면은 인터넷이 이제 거대한 홈쇼핑 센터로 변했고 국민을 각성시키는 정보는 제공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원치도 않는 물건을 사기 위해 모니터 앞에 달라붙어 있게 만들고 있어요.

▽장영준〓 많은 사람들이 교수님의 두 가지 이력에 대해 궁금해 합니다. 즉 언어학자인 교수님이 어떻게 그렇게도 강력한 사회비평가가 되었는가, 혹은 양자의 관계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 말입니다.

▽촘스키〓 그 문제에 관해 자주 질문을 받습니다. 저는 아직도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장교수가 만일 목수라면 더 이상 인간이 아닌가요. 목수는 목수 일만 해야 하고 인권에는 관심을 가지면 안될까요. 언어학자는 더 이상 사람이 아닌가요.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정치학 훈련을 받은 사람만 정치적 언급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장영준〓 교수님은 1966년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지식인의 책무’란 글에서 지식인은 정부의 거짓을 폭로하고 정부가 내세우는 명분과 동기, 숨겨진 의도 등을 분석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지식인이란 무엇입니까.

▼ 지식인이 세상을 바꿔야 ▼

▽촘스키〓 지식인이란 기묘한 용어입니다. 지식인이란 기본적으로 특권적 자원을 사용할 수 있고 특별한 훈련을 받아서 그들의 정신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특권을 누리지 못합니다. 가령 일주일에 50시간을 식당에서 일한다면 세상의 문제에 대해 생각할 겨를이 없겠지요. 작가나 학자는 그런 특권을 누릴 수 있어요.

▽장영준〓 사기업은 모든 불만을 정부로 쏠리게 하고 그들은 장막 뒤에서 이익을 취하고 있습니다. 점점 더 복잡해진 시스템에서 지식인들이 책임소재를 가려내기란 더 어려워진 듯 합니다.

▽촘스키〓 국내총생산(GDP)에 대한 지출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은 증가했지만 가난한 나라들은 감소하거나 정체상태입니다. 레이건 정부 시절 사기업에 대한 정부의 공공보조금과 위험부담률은 급팽창했습니다. 이것이 소위 신자유주의의 목적입니다. 이런 것을 알기 위해 굳이 뉴욕타임스를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지식인은 데카르트가 말하는 ‘건전한 양식’만 있으면 됩니다.

▽장영준〓 한국의 지식인과 시민단체에 한 말씀 해주시겠습니까.

▽촘스키〓 앞으로 어떤 세상에서 살 것인지 선택해야 합니다. 억압과 파괴의 세상에 살기를 원합니까. 생태계의 파괴로 후손들이 더 이상 살 수 없는 세상을 원합니까. 한편에서는 유례없는 경제적 부의 혜택을 누리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기아에 허덕이는 그런 세상을 원합니까. 아니면 이런 세상을 바꾸고 싶습니까. 여러분은 이제 선택해야 합니다.

◇ 노엄 촘스키 약력 ◇

△1928년 미국 필라델피아 출생

△미국 MIT대 언어학 석좌교수

△저서〓'통사구조론' '여론조작' 등

◇ 장영준 교수 약력 ◇

△1964년 강원 홍천 출생

△촘스키의 제자, 중앙대 영문과교수

△저서〓'언어의 비밀' '촘스키, 끝없는 도전'(역서)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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