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 (277)

  • 입력 1999년 11월 21일 19시 17분


여기선 모두 파 김치가 되었고 지친 사람들도 많아요. 하지만 이번 여름이 중대한 고비라고 믿고 민주노조를 건설하기 위한 준비를 지난 몇 달 동안 착실히 해왔어요. 아직 결정적인 싸움의 시기는 아니지만 각 공장 단위마다 교두보를 마련할 단계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작년까지 우리 같은 학출 노동자는 저까지 포함해서 네 사람이 이 회사에 있었어요. 그런데 씨티에서 결정이 내려와 일 개 조가 선도투를 하게 되었거든요. 남은 우리 조는 노출되지 않도록 뒤에서 방관만 하고 있었지요. 이런 형편은 모두 같지는 않지만 송 선배가 있던 중공업 쪽도 비슷했어요. 거기도 이번 여름에 대단한 투쟁을 치뤄냈지만요. 그쪽은 준비가 단단했어요. 지금은 옛날 눈치나 보며 굴종하던 그런 노동자가 아닙니다. 모두들 자신의 생존권을 되찾으려는 결의로 차있고 개중에는 조합주의를 넘어 노동자의 참정권을 확보해야 한다는 정치의식으로 무장한 이들도 많이 생겨났어요. 학출들은 과거처럼 의식화 작업에 긴 시간을 보낼 필요가 없답니다.

우리는 처음에 소식지를 만들어 각개 친목회별로 보급하는 일부터 했습니다. 우리 공장은 총원이 이천오백 명인데요 그 중에서 여성이 사백여 명 됩니다. 부녀회라고 하는데 아줌마들 삼십 오명 빼고는 거의가 제 또래의 이십대 여성들입니다. 우리 공장에선 냉장고와 세탁기 생산이 주종인데요 에어컨도 생산하기 시작했지요. 남자들 경우에 공고를 나오고 군대를 마친 이가 기본급 오천삼백 원이구요 여자는 무조건 삼천칠백 원이에요. 매출액 목표를 달성하면 보너스 오십 프로가 추가되고 유해수당은 명목상 있을 뿐 실제로 지급되는 경우는 없어요. 반장등 고참들이 적당히 나눠 먹지요. 한 달에 평균 잔업 시간이 백 시간이고 철야는 일주에 두 번이나 해요. 납품 기일이 딸릴 때 특근도 한 달에 한 두 번씩 합니다. 네 시간 잔업에는 빵이 나오고 철야에는 밥이나 우유가 나와요. 일요일 외에는 휴일은 일체 없는 셈입니다. 월차나 생리휴가가 명목상으로는 있는 것처럼 되어 있지만 찾아 먹을 수가 없어요. 그러니 연차 휴가는 거의 수당으로 지불하고 쉬는 예는 없답니다.

작업환경은 전자 계통이어서 산재는 가벼운 부상 정도이고 그리 심한 편은 아니에요. 다른 강철이나 화학 분야는 일주일마다 작고 큰 사고가 터집니다. 그대신 먼지가 많고 환풍 시설도 불충분합니다. 샤워장이 있지만 공업용수여서 거의가 한번도 사용하는 적이 없어요. 친목회는 조기축구회 야구회 등산회 낚시회 부녀회가 있어요. 그중에는 우리와 따로 노는 구사대도 있지요. 과거의 노조는 어용일색이라 지부장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어요. 그들은 사건이 터지면 언제나 회사측 입장에 서서 우리를 탄압하곤 했거든요.

작년에 학출들은 친목회에서 우리들과 생각이 거의 같거나 더 경험도 많고 노련한 이른바 선각적인 노동자들을 찾아내게 되었어요. 그들을 중심으로 핵을 만들고 그들이 우리를 지도해 주기를 바랬어요. 우리는 그들에게 사회의 정치적 상황이나 노동법이나 읽어야할 책들을 소개해 주었고 그들은 일반 노동자들이 어떤 삶을 살아가며 어떻게 조직해야 할것인가를 저희들에게 가르쳐 주었지요. 이런 상황은 우리 선배들이 숨을 죽이고 고독하게 작업하면서 한 두 번 행동에 옮기려다가 현장에서 해고 되면서 검거 당하던 사 오 년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진전이지요.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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