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맛나는 세상]장애인-노인의 손발된 '119가족'

  • 입력 1999년 10월 22일 19시 15분


“남을 돕는 봉사는 생활의 일부가 아니라 생활 자체예요.”

서울 관악소방서 난곡소방파출소 소속 119구조대원 유평석(柳平錫·35·강서구 등촌동)씨와 동갑내기 아내 황선지(黃瑄智)씨, 이들 부부의 사랑스러운 남매 동민(10·초등학교 3년), 정민(7·여·초등학교 1년)이는 늘 바쁘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 일 때문이 아니다.

유씨는 소방파출소에 2명뿐인 119대원중 한명으로 하루 걸러 24시간씩 맞교대 근무한다. 현장의 유일한 구조대원이다보니 격무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는 오전 9시에 퇴근하면 집으로 가지 않는다. 거동이 불편한 장애인과 노인들의 ‘손발’이 돼 서울시내를 누비는 것. 일찍 끝나야 오후 3∼4시이고 보통 저녁 늦게서야 귀가한다. 그가 모는 봉고차는 경유차인데도 주유비가 한달에 꼬박 12만원 이상 든다.

최근 유씨는 사고로 7년간 입원했다 최근 퇴원한 1급 장애인 이모씨(37)와 함께 강남면허시험장 송파구청 국립재활원 등을 수시로 방문한다. 다리를 전혀 움직일 수 없는 이씨가 ‘삶의 의지’를 다지며 운전면허를 따려 해 장애인을 위한 무료 운전강좌가 개설된 이 기관들에 동행하는 것.

물론 그의 손발과 따뜻한 마음을 필요로 하는 건 이씨뿐만이 아니다. 매주 적어도 10명의 일을 돌봐야 하기에 유씨는 늘 바쁘다. 장애인봉사단체 ‘부름의 전화’에 가입해 91년부터 이같은 생활을 해왔으니 벌써 9년째다.

유씨는 “어머니 아버지 손에 이끌려 어렸을 때부터 중증장애인 돕기를 하다보니 자연스레 이 생활을 계속하게 됐다”며 “가정에 신경쓰지 못해 미안하지만 적극 이해하고 격려하는 아내가 늘 고맙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내 황씨 역시 바쁘기가 만만치 않다. 그도 95년부터 강서구 등촌1동 종합사회복지관에서 일한다.

‘독거노인 자원봉사자’인 그는 때론 남편과 함께, 때론 두 남매와 함께 김치 등 반찬을 만들어 독거노인들에게 전달한다. 또 이들을 위한 청소와 목욕 등 다양한 일에 매주 사흘씩 꼬박 매달린다.

황씨는 “89년 결혼 뒤 남편의 ‘멋있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자연스럽게 참여하게 됐다”며 “이젠 봉사활동을 빼고 우리 가족의 생활을 얘기할 수 없을 정도”라고 말했다.

남매도 이들 부부의 삶에 큰 활력소. 태어나면서부터 봉사활동에 따라다닌 동민 정민 남매는 어느덧 ‘홀로서기’를 할 정도가 됐다. 남매 모두 수년전부터 한달에 한번꼴로 엄마가 싸준 반찬을 들고 혼자 독거노인들의 집을 찾아가고 휠체어를 요령있게 밀 수 있다.

동민이는 최근 사지를 잃은 일본인의 재활의지를 다룬 ‘오체불만족’을 읽고 눈물을 흘릴 정도로 남의 아픔을 가슴에 새기는 체질이 됐다. 그렇다면 이들 가족의 바람은 뭘까. 간단하다. 장애인들이 건강했던 시절의 기억에 매달리지 않고 자립하는 것. 그리고 평일에 더 많은 자원봉사자가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장애인이 무엇인가 일을 하려 해도 평일엔 도와줄 사람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이헌진기자〉mungchi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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