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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1999년 9월 1일 18시 3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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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포드(1863∼1947)는 자동차 발명자도 아니고 분업이나 컨베이어벨트의 창시자도 아니지만 이 모두를 종합해 새로운 생산방식을 창출했다. 도살장의 해체라인을 자동차 조립라인으로 바꾼 것이나 평균일당의 두배가 넘는 5달러 발상을 한 점에서 그는 천재였다. 5달러 일당은 비용보다 훨씬 많은 이익을 가져왔기 때문에 그는 ‘가장 경제적인 발상이었다’고 흡족해했다.
포드는 노동통제를 위한 장치들을 고안하는데도 천재였다. 그의 공장에는 작업시간에 화장실을 자주 가는 등 비적격자를 골라내기 위해 ‘감시조’가 편성됐고 감시조에 걸린 사람들은 해고 전단계인 ‘대기조’로 분류됐다. 권투선수였던 해리 베네트나 전과자들을 경호원으로 고용해 악명을 떨쳤고 노동조합은 자동차회사들중 가장 마지막으로 41년에 도입했다. 한때 포드사에는 ‘사업주의 첩자가 자동차 만큼이나 많다’는 말이 돌았다. 그는 반유태주의자로서 히틀러의 훈장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디어본의 농가에서 태어난 그는 스스로를 농부의 아들이자 노동자로 생각했고 사치를 혐오했다. 33세에 처음 자신의 손으로 자동차를 만들었을 때부터 그는 누구나 탈 수 있는 값싸고 튼튼한 차를 만들겠다는 꿈을 갖고 있었다. 그의 성격상 그 꿈은 ‘필연’이었다. 또한 기계에 대한 그의 지대한 관심이 없었다면 컨베이어벨트를 실험하고 도입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스스로 “내가 ‘현대’를 발명했다”던 그는 신화와 그 신화를 벗기려는 비평가들의 혹평, 그 사이 어딘가에 위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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