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의 향기]김기백 ‘말랑말랑한 말들을’

  • 입력 1999년 8월 30일 19시 16분


돌 지난 딸아이가

요즘 열심히 말놀이 중이다.

나는 귀에 달린 많은 손가락으로

그 연한 말을 만져본다.

모음이 풍부한

자음이 조금만 섞여도 기우뚱거리는

말랑말랑한 말들을.

어린 발음으로

딸아이는 자꾸 무어라 묻는다.

발음이 너무 설익어 잘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억양의 음악이 어찌나 탄력있고 흥겨운지

듣고 또 들으며

말이 생기기 전부터 있었음직한 비밀스러운 문법을

새로이 익힌다.

딸아이와 나의 대화는 막힘이 없다.

말들은 아무런 뜻이 없어도

저 혼자 즐거워 웃고 춤추고 노래하고 뛰어논다.

우리는 강아지나 새처럼

하루종일 짖고 지저귀기만 한다.

짖음과 지저귐으로도

너무 할말이 많아 해 지는 줄 모르면서.

―시집‘사무원’(창작과 비평사)에서

어떤 말도 축적이 되어 있지 않아 그저 옹알옹알거리던 아이가 말에 가까운 말을 처음 발음할 적에 곁엣사람이 내지르게 되는 탄성은 전율에 가까운 기쁨이다. 아이와 뒹굴며 놀고 있는 젊은 아버지가 아이의 연한 말을 통해 다시 말을 익히고 있다. 우리가 너무 써서 닳아버린 말들, 권력이 붙어버린 말들을 다 떼어내버리고 흥겹고 춤추고 노래하고 지저귀는 것같은 그런 말들을.

신경숙(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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