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197)

  • 입력 1999년 8월 17일 19시 19분


가느다랗게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고 구령을 붙이는 소리도 들려왔지요. 흰 벽의 검은 창들은 무슨 예쁜 하모니카처럼 보였어요. 그렇지만 입을 대고 불면 나직하고 무겁게 밑바닥에서 울려나오는 저음만 날 것 같이. 그건 또 어떤 벌레의 눈처럼 보이기도 했구요. 그런데 아, 자세히 보면 그 창턱 아래 무언가 울긋불긋한 색깔이 보이는 거예요.

그래 빨래야, 빨래로구나!

아무것도 없는 듯이 보이는 흰 벽 위에 살림살이의 흔적인 빨래가 널려 있었습니다. 그것만이 비어 있는 시멘트 건물 위에서 색색가지로 힘차게 나부끼고 있었지요. 호루라기 소리와 구령 소리가 들리고 철문을 여닫는 소리가 정말 또렷하게 들려왔고 잠시 후에 창문가에 사람의 모습 같은 움직임들이 보였어요. 창문마다에서 손과 팔이 나와 빨래를 하나 둘씩 걷어들이고 있었어요. 나는 그제서야 돌아서서 다시 걸었습니다. 두 번 다시 그 창문들을 보고싶지 않았거든요. 버스를 타러 한적한 읍내에 들어서자 나처럼 자유스러운 사람들이 길을 건너기도 하고 상점에서 나오기도 하며 서로를 부르고 반기며 하는 양들이, 어쩐지 비디오 영화를 보다가 소리줄임 버튼을 누르고 동작만을 볼 때처럼 기계적이고 허망했습니다.

나는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로 올라오면서 당신을 생각했습니다. 갈뫼의 나날을 순서대로 되짚어 보기도 했구요. 나는 이제부터 내 자신 스스로의 생을 열어 나가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나의 그림을 위해서 하다못해 내 손가락 끝에서 피 몇 방울이라도 흘려야 한다고도 생각했구요. 나는 과감하게 혼자서 그 길을 갈 거예요. 그리고 이 다음 오랜 후에 내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나온 당신 앞에 서게 될지 지금부터 윤곽을 정해야 할거라구요.

밤이 되어 추석 가까워진 귀퉁이가 조금 일그러진 달이 버스의 차창을 따라서 계속 흘러오고 있었습니다. 가끔씩 부연 들판 저 너머로 밝은 창을 가진 집들이 모여있는 게 보였어요.

나는 이제부터 나에게로 돌아갈 결심을 했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쓰는 글은 이제 다신 안쓰게 될지도 몰라요. 어쩌면 나를 향하여 쓸 수 있을 겁니다. 제발 몹쓸 병에 걸리거나 쓰러지지 말기를 빌어요. 살다가 언젠가 갈뫼 생각이 나면 그리로 돌아가게 될지는 모르겠어요. 아마도 우리는 무참하게 패배하게 될지도 몰라요. 그렇지만 무슨 대수예요. 까짓 거, 쓰러진 채로 그냥 하늘을 볼 거예요. 하늘 구석엔 저어 끝자락에 가느다란 띠처럼 노을이라도 한 줄기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 무섭고 끔찍한 희망처럼 가냘프게 남아 있게요. 잘 있어요. 당신의 암울하고 어두운 고독 속에서 뭔가 남아있을 걸 미리 기대하진 말고.

아, 어떻게 우리가 이 작은 장미를

기록할 수 있을건가

갑자기 검붉은 색깔의 어린 장미가

가까이서 눈에 띄는데

아, 우리가 장미를 찾아온 것은 아니었지만

우리가 왔을 때

장미는 거기에 피어 있었다

장미가 그곳에 피어 있기 전에는

아무도 장미를 기대하지 않았다

장미가 그곳에 피었을 때는

아무도 장미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

아, 출발도 한 적 없는 것이

목적지에 도착했구나

하지만 모든 일이 워낙 이렇지 않았던가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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