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181)

  • 입력 1999년 7월 29일 18시 38분


아래층 미결수들이 가끔씩 빵조각이나 땅콩을 던져주기 때문에 비둘기들이 마당에서 종종걸음을 치던 것이다. 비둘기 떼가 마당에 내려앉았고 맨 나중에 순이도 내려앉아 절름절름 하면서 눈 위를 뛰어다니는게 보였다. 무엇인가 창고 밑 어둠 속에서 휘익 튀어나와 뒤처져 있던 순이를 덮쳤다. 순이는 제대로 퍼덕이지도 않고 축 늘어진 채 깡패의 입에 물려 있었다. 이상하게 나는 조용하고 냉정한 느낌으로 이 살육을 지켜 보았다. 고양이가 내 방 창문에서는 보이지 않는 영치품 창고의 뒤편으로 먹이를 물고 돌아갔으므로 그 이상의 장면은 보지 못했다. 나중에 운동 시간에 사동 앞 빈터로 나가 창고 뒤로 돌아가 보았는데 모퉁이에서부터 벌써 핏방울이 흠씬 떨어져 있었고 뒤로 돌아가 보니 더욱 참혹했다. 흰 눈 위에 핏자국이 번져 있고 두 날개의 깃털만이 남아 있었다. 부드러운 깃털들은 바람에 불려 주벽에의 접근을 가로막고 있는 철조망에 붙어서 하늘거렸다. 마치 깃털들은 아직 살아있는 듯이 보였다.

다음날에도 또 그 다음날에도 겨울이 가고 봄이 될 때까지 나는 다른 비둘기들에게 하루 두 번씩 모이를 주었지만 이제는 구별하는 비둘기들은 만들지 않았다. 애착은 무상하다. 내가 고양이를 베어버린 선승은 아니지만 우선 이러한 손 쉬운 것부터 놓아 보내지 않으면 세월을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팔십 삼 년 사 년은 어떻게 지나갔던가. 아마 그 전 전 해와 다름이 없었겠지. 단식을 몇번 하고 문을 차거나 철창을 식기로 두드리며 구호를 외치고 투쟁가를 부르고 징벌방에 갇히고를 반복했을 것이다. 말다툼을 하고 토론을 하다가 죽이고 싶도록 미워지고 하찮은 먹을 것을 가지고 욕설을 해대고 헤어져 독방에 돌아와서는 연민 때문에 곧 후회하게 되는 감방 동료가 한 사람이라도 있었으면 싶었다. 공권력은 나를 너무도 잘 다룬다. 그들은 시간의 덧없음을 알고 있다. 일제 때부터 해왔던 행형술은 그동안 전쟁과 정권교체와 세월의 변화를 통해서 수많은 경험을 쌓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언제나 새로운 카드가 있었다. 나는 예전에 읽었던 책의 자세한 내용들은 모두 까먹었다. 그리고 큰 선에서의 원칙들만 남았다.

16

팔십 사 년 봄에 나는 학교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이젠 아줌마였지만 그래도 겉으로는 아직 젊었어요. 은결이는 우리 나이로 벌써 세 살이 되었구요. 대학원에 들어가면서 나는 집에서 나왔죠. 정희는 대학병원에서 인턴을 하고 있었어요. 나는 대학가 부근의 이층에 화실을 내고 실기를 위한 수강생들을 받았어요. 하기 싫은 짓이었지만 사업 형편이 아주 좋아진 엄마에게 나까지 기대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그리고 혼자 있으면서 내 공부를 열심히 하고 싶었기도 해요. 은결이는 집에 맡겨 두었죠. 일하는 아줌마가 있었고 엄마도 밑에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예전처럼 바쁘진 않았으니까요. 엄마는 오히려 은결이가 집에 있는 걸 다행스럽게 생각했어요.

당신은 안에서 몰랐을 거예요. 그 무렵에 대학가는 날이면 날마다 최루탄 가스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감옥과 사회로 쫓겨났던 많은 사람들이 복학생이 되어 학교로 막 돌아온 무렵이었으니까요. 오월의 충격에서 서서히 깨어난 사회적 역량들이 차츰 집결되고 있는 중이었지요. 천 여명의 시국사범들이 풀려 나왔지만 당신들 같은 이른바 좌익수들은 한 사람도 나오지 못했어요. 냉전은 점점 고조되고 있어서 이러다가 세계대전이 일어나지 않을까 염려스러울 정도였지요.

나는 그 무렵에 한 남자를 알게 되었어요. 모쪼록 실망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없는 동안 내게는 그가 유일한 친구였습니다.

<글: 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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