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147)

  • 입력 1999년 6월 20일 19시 47분


으짜긴 뭐 으째, 끝까지 도바리 쳐야지. 어디 밀항이라도 허든지요.

애들이 반 죽을 텐데.

이자는 한 고비 넴겼을 거여. 구치소 넘어갔을 거인디.

다시 시작해볼지 어떨지 생각 중이다.

이야기 소리에 잠이 깼는지 아직도 술이 덜 깬 채로 명헌이가 부스스한 얼굴로 칸막이 안에서 나왔다.

누가 온거야, 지금 몇 시냐?

넌 맨날 술이로구나.

어 망할 자식 말하는 것 좀 봐라. 여기가 어디라구 기어들어 왔니. 신고해 버릴까부다.

호선이가 냉장고에서 보리차를 꺼내어 병째로 내밀었다. 명헌이는 벌컥이며 달게 마시고는 조금 정신이 들었는지 고개를 거세게 흔들었다. 나는 보다 진지하게 말했다.

고생이 많겠구나.

니가 임마 웬 참견이야. 호선이가 고생이지. 맨날 내 술시중 드느라구. 그나저나 어디서 오는 거야?

지하에서 올라왔다.

우리처럼 지상 이 층에 살지 그랬냐. 느이 어머니한테서 여러번 전화 왔다. 누님두 한번 여기 찾아 왔었어. 동생이 이민간대. 마지막으루 얼굴이나 보겠다구.

녀석이 이민을 간대?

그렇대니까. 수속이 다 끝났다더라.

곁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호선이가 말했다.

그래서…집에 가실라오? 아예 진을 치구 있을텐디. 아니먼 동네에 벌써 밀대를 박아놨을 거요.

나는 탁자 위에 고개를 처박고 조용히 말했다.

정리하기루 했다. 내가 할 몫은 이제 다 끝났어. 자수를 할 생각은 아니지만.

두 사람은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명헌이가 하품을 하면서 중얼거렸다.

야 자자 자. 이따가 일어나서 다시 생각해 보기로 하고. 아직 해두 안떴어. 날이 새면 언제나 생각은 바뀐다구.

철로를 지나는 요란한 기차의 굉음 소리에 명헌이와 내가 깨어난 것은 정오 무렵이었다. 호선이는 벌써 일어났는지 보이지 않았다. 명헌이 일어나 창문에 쳐 두었던 두터운 천을 젖히니 햇빛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왔다.

아이구 속 쓰려. 나가서 국밥이라두 사먹자.

얜 어디 간 거야?

응 일 나갔겠지.

수배자가 무슨 일이야?

요 너머 아파트 공사장에 일자릴 얻었다. 좀이 쑤셔서 못견뎌 하길래 내가 건축과 동창 놈한테 부탁했지. 그래두 허드레 일은 아니니까 별로 어렵지는 않을 거야.

우리는 골목 밖에 나가지 않고 이층 집에서 맞은 편으로 두번째에 있는 작은 간이식당으로 갔다. 점심 시간인데도 꼭 한 사람이 앉아서 뼈다귀 해장국을 먹고 있었다. 우리도 같은 걸 시켰다. 음식을 기다리며 마주앉았던 명헌이가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더니 한마디 했다.

너 얼굴이 많이 부드러워졌다.

맨날 똑같은 상판인데 그 전에는 어땠어?

음, 눈에는 초조 불안 긴장으루 독이 제법 올랐었지. 볼은 포옥 꺼져 가지구 말야.

헌데 지금은?

<글: 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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