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121)

  • 입력 1999년 5월 20일 19시 23분


아주머니는 한 사십 대 중반 쯤이나 되었을까. 화장기없는 얼굴에 퇴색한 어두운 색 원피스를 입고 피로한 기색이었다. 누가 보더라도 세 사람이 일행처럼 보이게 하려면 이 아주머니와 친해져야 한다고 생각되어서 나는 말을 걸었다.

아주머니 어디까지 가세요?

서울이요.

간단히 대꾸한 아낙네는 나를 의심스러운 듯이 찬찬히 살폈다. 나는 그네의 의심을 풀어 주려고 웃는 얼굴로 말했다.

우리두 서울 갑니다. 이 사람은 목사구요 저는 선생입니다.

나는 시키지 않은 소리까지 해가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네는 우리의 얼굴을 둘러보고 나서 처음보다는 긴장이 풀리는 모양이었다. 아낙네가 한숨을 푹 내쉬더니 역시 시키지 않은 말을 꺼냈다.

난생 처음 이렇게 긴 여행을 해봅니다. 모두 광주가 무섭다더니 한가하고 조용하든데….

어디 친척 집이 있으세요?

아녜요. 우리 큰 아이 땜에….

하다가 아주머니는 갑자기 뭔가 복받쳤는지 손수건을 꺼내어 눈시울을 찍어냈다.

광주 교도소에 우리 아들 면회 왔다가 가는 길이우. 지난 달에 서울서 일루다 이감 와서.

최와 나는 얼른 시선을 주고 받았다. 아낙네는 교도소 얘기를 꺼내 놓고는 마음이 걸렸는지 앞 뒤를 둘러 보았다.

우리 아이는 학생이에요. 이제 겨우 이 학년이라구요. 광주에서 천인공노할 일이 벌어졌다구 작년 내내 그러더니 가을에 개학을 하자마자 머 교내에 유인물을 뿌렸다든가, 그랬대요.

죽일 놈들!

최 전도사가 얼른 추임새로 끼어들었고 나도 한마디 했다.

무고한 사람들 수천명이 죽고 다쳤답니다.

글쎄말예요. 무슨 깡패나 빨갱이들이 폭동을 일으켰다고 떠들든데 여기 식당이나 가게나 아무데 가서 물어봐도 거짓말이라고 합디다. 얘기만 나오면 모두들 흥분해서 서루 말할라구 하든데 뭘. 도대체 정권이 뭐야 증말.

우리 여행은 지루하지 않게 되었다. 이 겁 먹고 기진한 어머니에게 용기와 자랑을 불어넣어 드려야 했다.

말을 안해서 그렇지 요즘 사람들은 다 알구 있다구요. 나중에 천벌을 내려야 해. 세월이 얼마나 갈지 모르지만.

나는 마음이 푸근해졌다. 이런 어머니는 전국에 얼마나 많을까를 생각했고 그네들의 눈물을 떠올렸다. 그래 생생한 세상에 나오기를 잘했다.

우리가 영등포 역에 도착한 것은 새벽 다섯 시 쯤이었다. 나와 최는 약속했다는 듯이 두리번거리다가 사우나가 있는 목욕탕으로 들어갔고 샤워 한번 하고나서 목침을 베고 한잠씩 잤다. 일곱 시에 나와서 최가 전화를 걸었는데 역시 불통이었다. 우리는 아직은 출근 시간 전이라 빨리 이동하기로 하고 건이네 요꼬 방이 있는 산동네 근처까지 갔다. 나는 한 정거장 전에서 내려 약속한 시장 초입의 순대국집으로 들어갔고 전도사는 내가 가르쳐준 대로 건이네로 찾아갔다. 그냥 우두커니 기다릴 수도 없어서 국밥 한 그릇 시켜 놓고 먹는둥 마는둥 하고 앉았는데 차림표로 걸어둔 입구의 천 조각을 들치며 혜순이가 앞장서서 들어섰다. 두 사람은 말없이 내 앞에 앉았다.

<글: 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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