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GO]「성희롱없는 일터」 가꾸는 여성단체들

  • 입력 1999년 5월 4일 10시 41분


지난달 30일 서울 종로의 한 여성단체 성희롱 상담원 회의시간.

“올 2월 여상을 졸업한 여성의 상담전화였어요. 50대 전무가 자꾸 느끼한 목소리로 ‘사랑한다’고 귀엣말을 한다는 거예요. 얼굴만 빨개진 채 다른 사람들이 눈치챌까봐….”

“엊그제 진행한 면접상담과 비슷하네요. 역시 올해 여상졸업생이었는데 과장이 노래방에서 다리를 주무르고…. 여자로 태어난 것을 후회한다고도 하고, 남자에 대한 혐오감이 대단했어요.”

여성단체의 성희롱 상담창구에는 남녀고용평등법 개정과 남녀차별금지법 제정을 계기로 도움을 요청하는 여성들이 크게 늘고 있다.

1월에는 한국여성민우회와 울산여성의전화 도움을 받아 울산 T산업의 여직원이 회식자리에서 몸을 더듬고 성적 농담을 한 직장상사를 처벌해 줄 것을 회사측에 요구해 정직처분을 받게 한 적도 있었다.

여성단체에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은 피해자 뿐만이 아니다. 직장 내 성희롱 예방교육이 의무화하면서 기업들의 교육의뢰나 자료요구도 잇따르고 있다.

직장 내 성희롱에 무심했던 기업들이 성희롱 문제로 법적인 처벌과 함께 회사 이미지에 타격을 받을 것을 염려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여성단체들은 최근 성희롱 피해자에 대한 상담을 강화하고 있다. 기업에 대한 자문이나 교육에도 물론 적극적이다.

특히 여성민우회는 성희롱 예방교육 전문가들로 구성된 ‘강사뱅크’를 운영하는 한편 피해자의 소송을 돕기 위한 공동변호인단을 구성했다.

그러나 아직 피해자들은 직장에서 문제를 제기하거나 소송을 내는 것을 주저하는 분위기. 여성민우회 최명숙(崔明淑)여성노동센터 사무국장은 “피해자가 죄인 취급을 당하거나 ‘이상한 눈초리’를 받기 때문”라고 설명했다.

또 성희롱 관련법에 아직도 가해자가 아닌 사업주의 처벌만 명시돼 있는 것도 피해자가 소송을 주저하게 하는 이유. 그냥 덮어버리려다가 용기를 내보지만 절차에 대한 상담원들의 설명을 듣고는 소송을 포기한다는 것.

성희롱 피해자 서모씨(25·여·호텔 근무)는 “성희롱과 싸우는 동안 각종 루머 때문에 괴로웠고 죽어버리면 가해자나 회사측이 미안해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휩싸이곤 했다”며 “여성단체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어려움을 극복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성희롱 관련법은 성희롱을 예방하고 인식을 바꾸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한 여성관련기관 인터넷사이트에 게시된 내용.

‘저희 호텔 전무님은 성희롱을 즐기셨던 분입니다. 그러나 성희롱 관련법이 만들어진 뒤 그런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저한텐 거의 할아버지뻘 되시는 분이 하루는 제 유니폼 가슴쪽에 흰 먼지를 털어내는 시늉을 하시며 손을…. 성희롱 관련법이 잘 만들어진 것 같아요.”

성희롱의 법 조문화에는 여성단체들의 힘이 결정적이었다. 여성단체들은 93년 서울대 신교수 성희롱사건이 일어나자 13개 단체가 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하는 한편 성희롱 금지조항 신설을 위한 실태조사와 시위를 주도하면서 중요한 계기를 만들었다.

성희롱과의 전쟁은 아직도 멀다. 서울대 신교수 사건도 끝나지 않았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여성민우회 한국여성의전화연합 등 여성단체와 공동변호인단은 6년째 엎치락뒤치락하는 재판을 끌어오고 있다.

대법원은 정부와 서울대총장에 대한 손해배상청구는 기각했지만 신모씨에 대해서는 원고패소판결을 내린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21일에도 재판이 열린다.

성폭력상담소 장윤경(張允瓊)사무국장은 “비디오를 통한 성희롱 예방교육을 문의하는 등 법망을 피하려 하거나 아예법자체를모르는 사람도 적지 않다”며 “근본적으로 성희롱이 발생하지 않도록 남녀평등의 제도화를 위해 노력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김진경기자〉kjk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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