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노랑머리」 사상 첫 등급보류 판정

  • 입력 1999년 3월 9일 18시 15분


공연예술진흥협의회(공진협)가 최근 영화등급부여 심의위원회에서 ‘노랑머리’에 대해 사실상 상영금지를 의미하는 등급보류를 판정, ‘표현의 자유 침해다’ ‘노골적 성인영화의 상영금지는 당연하다’는 논란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영화사 ‘픽션뱅크’가 제작한 이 영화는 지난해 시나리오 심사에서 영화진흥공사의 판권담보 융자 지원작으로 뽑혀 3억원을 받은 작품. 국가의 지원을 받아 제작한 영화가 국가에 의해 상영금지 처분을 받은 셈이다.

97년 10월 공진협 출범 이후는 물론, 그 이전 공연윤리위원회(공륜)에서도 등급보류 판정이 내려진 것은 영화심의 사상 처음이다.

★어떤 내용인가★

아버지에게 오랫동안 추행을 당해온 유나(이재은 분)와 홀어머니가 작은 식당을 하는 상희(김기연). ‘삶이 치사하게 느껴진’ 이들은 어려보이는 것이 싫어 머리를 노랗게 염색하고 가출한다. 증권회사 직원인 영규(김형철)도 돈이 탐나지 않는데도 순간적으로 고객의 돈을 빼돌린 뒤 나이트클럽을 전전한다.

록카페에서 만난 세 사람은 자취방에서 동거하며 둘이서, 때로는 셋이서 섹스에 탐닉한다. 두 노랑머리는 어느날 영규가 같은 회사 여직원과 만난다는 사실을 알자 연적을 살해한 뒤 영규마저 죽이고 만다.

KBS드라마 ‘토지’에서 아역 서희 역에 이어 ‘용의 눈물’에 출연했던 이재은과 영화 ‘산부인과’의 김기연이 여주인공을 맡았다. 영규 역의 김형철은 그룹 ‘신촌 블루스’의 보컬로 활동했고 92년 영화 ‘비처럼 영화처럼’에서 연기자로 데뷔했다. 시나리오 작가 출신으로 영화‘커피 카피 코피’를 연출한 김유민감독의 네번째 영화.

★공진협 판단★

영화등급부여 심의위원 조희문교수(상명대 영화과)는 “여자2명과 남자1명의 혼음(混淫)을 그리는 등 거의 포르노 영화와 비슷한 수준”이라며 “표현의 자유가 영화를 아무렇게나 만들어도 좋다는 뜻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6명의 심의위원이 만장일치로 등급보류판정을 내리면서 “최초의 등급 보류결정이 ‘쓰레기’같은 영화를 ‘순교자’로 만드는 것이 아닌가”하고 우려했다는 후문.

심의위는 9일 회의를 열어 등급 보류기간을 3개월로 정했다. 그러나 내용을 대폭적으로 수정하지 않는 한 3개월후 재심을 해도 등급을 부여하기 어렵다는 게 공진협의 판단이다.

★감독의 항변★

“영화가 꼭 원인을 설명하고 대안을 제시해야 되는가. 탈출구없는 세기말적 허무와 갈등에 시달리는 세 주인공은 혼음 등 섹스를 통해 인간관계와 존재의 의미를 묻고 있다.”(김유민감독)

픽션뱅크 측은 “이 영화의 완성도가 높다고 주장하는 것만은 아니다”면서도 “그러나 공진협이 영화의 상영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사실상 검열이자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행위”라고 주장했다.

★이같은 영화는 볼 수 없나★

우리나라에는 등급외 전용관이 없어 등급보류 판정을 받으면 극장 상영이 불가능하다. 7일 타계한 거장 스탠리 큐브릭감독의 ‘시계태엽 오렌지’도 공식 상영관에서는 보지 못한다. 10대 불량배가 노래를 부르며 여자를 강간하는 장면을 비롯, 광기와 폭력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장정일 원작의 ‘내게 거짓말을 해봐’를 영화화, 개봉을 준비하고 있는 장선우감독 측도 “이같은 제도 아래서는 ‘내게…’ 역시 상영금지될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한다. 영화를 봐도 되느냐, 안되느냐의 최종판결은 관객에게 맡겨야 한다는 지적이다.

장감독의 97년작 ‘나쁜 영화’도 공륜에서 등급부여 보류결정을 받을 상황에 놓였으나 판정이 나기 전 일부 내용을 삭제, ‘18세이상 관람가’로 등급을 받은 바 있다.

★법원 판결과 전망★

96년 헌법재판소는 국가기관이 영화를 상영하기 전 심의를 받도록 하는 것이 표현의 자유에 위배된다는 판정을 내렸다. 이에 따라 국민회의는 지난해 성인영화 전용 상영관 허가와 완전등급제를 주요내용으로 하는 영화진흥법 개정안을 마련했으나 ‘포르노 전용관’을 합법화시킬 수 있다는 여론의 반발이 심해 ‘골자’가 제외된채 통과됐다.

이번 ‘노랑머리’ 파문은 영화법 개정이 남긴 해묵은 불씨들을 재연시킬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포르노와 같은 영화 상영을 허용해서는 안된다는 국민 정서도 만만치 않아 문제의 해결은 간단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김갑식기자〉gs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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