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스탠더드시대 41]부패 라운드

  • 입력 1998년 12월 1일 19시 10분


“여기가 미국인 줄 압니까. 이곳 관행대로 성의 표시는 해야죠.”

90년 초 국내 유력 자동차업체 A사와 막 거래를 텄던 미국의 B사는 큰 고민에 빠졌다. A사 구매담당자로부터 얼토당토 않은 ‘한국식’ 뒷돈 요구를 들었기 때문.

B사 내규상 일체의 리베이트나 뇌물제공이 금지돼 있어 어떻게 대응할지 막막했다. B사의 한국 지사는 결국 별도법인을 세웠고 이 별도법인이 B사로부터 받은 물품에 뇌물을 끼워 A사에 전했다. ‘한국적 현실’과 B사의 내규를 절충한 셈이다.

역대 대통령들의 수뢰사건과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등을 통해 외국투자가들 사이에선 ‘부패〓한국’의 이미지가 강하게 심어졌다. 덴마크에 본부를 둔 국제투명성협회가 매년 발표하는 부패지수에서 올해 한국 청렴도 순위는 세계 80여개국 중 43위. 아프리카에 있는 짐바브웨와 동급이다. 싱가포르(7위) 홍콩(16위) 대만(29위)에 크게 뒤졌다.

대부분의 선진국들은 부패사건이 벌어지면 청렴규정을 강화시켜 재발을 방지해왔다.

미국은 79년 연방선거운동법 등을 통해 3개월마다 정치인들이 연방선거위원회에 정치자금 내역을 보고하도록 의무화했다. 개인헌금 1천달러, 단체 헌금 5천달러로 상한을 정하고 1백달러 이상 기부는 자금추적이 가능하도록 수표로 하도록 했다. 뉴트 깅리치 전 공화당 하원의장도 이같은 규정에 걸려 벌금 30만달러를 연방선거관리위에 내야 했다. 미 상하의원은 95년엔 선물조차도 건당 50달러, 연간 1백달러 이하로 제한받는다.

우리나라 국회에도 의원들이 직무관련 금품을 받아선 안된다는 윤리규정이 있다. 그러나 금품의 상한액수가 정해져 있지 않아 ‘고무줄 규정’에 불과하다는 평이다. 여태껏 금품을 받았다는 이유로 국회 차원의 징계를 받은 의원은 한명도 없다.

싱가포르는 이미 60년에 강력한 부정부패방지법을 만들었다. 공무원이 재산형성 과정을 설명하지 못할 경우 부정하게 벌어들인 것으로 간주, 동결 몰수할 수 있게 한 것. 총리 산하 독립기관인 부패행위수사국은 부패혐의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공무원을 구속수사할 수 있다.

선진국에선 ‘부정부패 결과 피해는 나에게 돌아온다’는 인식이 강하다. 미국의 내부고발자 지원단체인 ‘갭(GAP)’과 ‘패프(PAF)’ 등은 이런 국민의식에 따라 부정부패 척결에 나선 시민단체. 패프는 정부 관급공사 발주시 민간업체들이 공무원과 짜고 설계를 변경해 예산을 낭비하는 사례 등을 신고받아 소송을 건다. 국가가 돌려받게 되는 부당이익금의 10%는 제보자에게 주어진다.

일본 정계에서 막강한 권력을 자랑하며 정치자금을 주물렀던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전총리는 시민들의 항의 때문에 구속됐다. 다나카의 구속기소를 도쿄지검 특수부가 꺼리자 시민들이 들고 일어나 검찰에 항의편지 보내기운동을 벌였던 것. 90년대 초 이탈리아 언론이 중심이 돼 마피아의 검은 돈에 물든 공직자를 몰아낸 ‘깨끗한 손 운동’도 시민운동의 승리사례로 꼽힌다.

외국기업이 물밀듯 들어오는 요즘 기업 및 관료의 부패관행은 더이상 국내문제에 머물지 않는다. 국제사회에서 논의가 무르익는 ‘부패라운드’는 무역거래와 자금거래의 부패관행을 일소해 공정한 룰을 확립하자는 것. 경쟁력이 우세한 선진기업들이 개도국 등에서 석연치 않은 이유로 패배하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의도가 들어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등이 현재 마련중인 구체안은 ‘뇌물수수로 피해를 입은 나라가 감시 및 집행자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부패가 입증되면 부당이익을 토해내야 하고 향후 국제거래에서도 제한을 받는다. 내년 4월1일까지 국별 법안을 제출하고 같은 해 12월17일까지 발효한다는 일정. 2000년부터 한국의 뇌물관행은 국제감시를 받아야 할 처지다.

부패추방에는 국민의식 개조도 중요하다. 전남도청 법무담당관실에서 근무하는 박화현(朴和鉉)씨는 “꼭 사람을 만나 인사를 해야 문제가 풀리는 것으로 아는 시민의식도 부패를 조장한다”고 말했다. 병원 입원할 때, 각종 벌과금을 부과받았을 때, 명절때 귀성차표를 얻으려 할 때 규정대로 하거나 순서를 지키지 않고 아는 사람을 찾아가는 관행이 ‘작은 부패’라는 지적이다.

〈박래정기자〉ecop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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