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마이너 리그(37)

입력 1998-11-30 19:30수정 2009-09-24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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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정 ⑭

재일교포 간첩사건의 조직도 맨 위에 있는 인물은 2층 대학원생의 선배였다. 기사에 따르면 조총련계로서 북한에도 왕래한 적이 있는 그는 학원침투를 목적으로 2층 대학원생을 포섭했다. ‘조총련’이란 말이 일단 두환에게 만만찮은 느낌을 주었다. 조총련의 악명이라면 어릴 때 ‘실화극장’이라는 텔레비전 드라마를 통해 얼마간 알고 있었던 것이다.

2층 대학원생은 조직도의 두번째 줄에 있었다. 그는 일본어 학원 강사의 수입만으로는 학비와 생활비를 대지 못해 늘 쪼들려 왔다가 공작금에 매수된 경우라고 했다. 그리고 세 번째 줄에는 포장마차에서 두어 번 본 듯한 얼굴들이 엮여 있었다. 한 명은 제주도 출신인데 집안이 4·3인지 뭔지와 연관이 있어 포섭의 일차 표적이 되었다는 거였다.

또 한 학생 역시 인공기를 변형시킨 도안의 붉은 옷을 입고 다닌 점으로 보아 일찍부터 사상이 불온했다. 그들은 한국이 얼어붙은 나라라고 정치현실을 비판하면서 기층민과 사회불만세력을 선동하려고 했다. 그 거점을 제공한 것이 포장마차를 운영하는 두환이었다.

―그러니까 그 말이 그런 뜻이었군.

자신이 실토한 내용이 이렇게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었다는 데에 두환은 간간이 감탄했다. 그러나 솔직히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더 많았다. 신문기사를 꽤나 열심히 공부했지만 두환은 또 한 번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은 공부와는 인연이 없다는 것을.

그 일로 두환은 여러 가지 혼란을 겪었다. 2층 대학원생이 보안사 요원으로 취직한 일도 그 중 하나였다. 간첩이 간첩 잡는 공무원이 되다니 두환으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일단 간첩 혐의가 씌워진 사람은 수사기관에 인생을 저당잡힌 셈이었다. 기소를 안 당하려면 그들의 손발 노릇도 마다할 수 없다는 사실을 두환은 알지 못했다. 그러므로 두환에게 ‘알 수 없는 세상이야’라는 입버릇이 생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두환에게 생긴 또 한 가지 입버릇은 ‘이놈의 나라에서는 되는 게 없어’였다. 왜냐하면 신원조회에 걸려 사우디에 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열사의 나라에서 사나이의 진정한 땀을 흘릴 날을 고대했던 그는 그만 낙백했다. 포장마차를 걷어치우고 한동안은 술로 세월을 보냈다. 깡패와 사상범의 전력을 가진 그는 풍진 세상을 거칠게 살아온 야인(野人)답게 일부 조무래기의 존경을 받아 공짜 술을 얻어먹기도 했다. 그것이 두환이 발 뒤꿈치나 콧구멍 한 개가 아닌 이른바 ‘온몸’으로 살아온 사연이었다.

두환이 다시 소주 한 잔을 입안에 털어넣었다.

―겨우 살 만하니까 마누라까지 데려가고. 이제 나한테 남은 건 아무것도 없다. 정말 인생이 이렇게 무상한 거냐.

뻔뻔스런 놈, 우리 셋은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두환이 너 혹시 그때 술 마시고 운전한 거 아니야?

―쪼끔 마셨지. 그것도 안 하면서 그 장사 어떻게 하냐.

역시! 우리는 왜 이럴 때만 생각이 비슷하냐는 눈길로 승주와 조국이 나를 건너다보았다.

<글:은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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