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마이너 리그 (36)

  • 입력 1998년 11월 29일 18시 20분


반정 ⑬

두환은 자기가 쓴 것을 수없이 되풀이해서 읽으며 그들을 기다렸다. 그는 숱한 담임 선생님들이 방과 후에 반성문을 쓰게 하고 그것을 검사한 다음 집에 보내주었듯이 그들도 그렇게 할 줄로만 알았다.

얼마가 지난 뒤 그들이 들어왔다. 방위병으로 보이는 청년과 함께였는데 청년은 사진기를 들고 있었다.

―저쪽으로 가서 서!

두환은 그들이 가리키는 대로 구석으로 가서 서려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바닥이 쿵, 소리를 내며 약간 내려앉았던 것이다. 발밑을 보니 그곳에만 엘리베이터만한 크기로 바닥을 도려냈던 자국이 나 있었다. 그 위에 서 있는 사람을 스위치 하나로 지하나 강물 속에 떨어뜨릴 수 있으리라는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장치였다. 잔뜩 긴장하여 발에다 최대한 체중을 적게 실으려고 노력하고 있던 두환은 스트로보 터지는 소리에 악, 하고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그들은 두환이 채운 종이 두 장을 집어던지며 소리쳤다.

―이게 다야? 숨기지 말고 몽땅 쓰랬잖아!

얼굴을 몇 대 갈기고 약간의 발길질도 가했다. 그런 다음 두환을 다시 혼자 두고 나가버렸다. 두환은 볼펜에 침을 묻혀가며 덧붙여서 써내려갔다. 소주 한 병하고 닭똥집 천 원어치 먹은 날 빨간 잠바 입고 왔음. 친구 둘과 함께 소주 한 병하고 꽁치구이 시켰다가 속이 안 익은 걸 그냥 먹었다고 불평해서 2백원 깎아줌. 자꾸 외상해달라고 해서 점점 싫어하게 됨.

그 다음에는 정말이지 한 자도 더 쓸 말이 없었다.

두환은 그제서야 눈물이 났다. 그가 여기에 온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죽어나간다 해도 시신조차 찾을 길이 없을 것이다. 이제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소희의 하얀 얼굴이 떠올랐다. 소희와 그리고 자신이 불쌍해서 두환은 조금 더 많이 울었다.

다섯 시간쯤 뒤에 두환은 빨간 방을 나와서 다른 방으로 옮겨졌다.

그 방에는 소파가 있었고 그리고 욕조도 있었다. 비누나 샴푸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이제 두환은 자연스럽지 않은 것은 무조건 의심스럽고 무서웠다. 그들이 자기 쪽을 바라보기만 해도 턱이 덜덜 떨렸다. 그들이 손을 움직이는 데 따라 마치 뺨을 맞는 사람처럼 저절로 얼굴이 옆으로 돌아갔다. 지옥같은 경험이었다.

두환은 풀려났다. 여기에서 있었던 일은 절대 말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각서에 지장을 찍고.

그 호텔에 들어갔다 나오니 그는 그 사이 간첩이 되어 있었다. 어느 신문은 그를 간첩이 접촉했던 인물이라고만 표현했지만 포섭된 고정간첩이라고 써제낀 신문도 있었다.

조직도에까지 두환의 얼굴을 당당히 끼워놓았는가 하면 어느 신문에는 두환이 2백만 원의 공작금을 수수했다고 보도되기도 했다. 두환은 일간지를 모조리 다 사보았다. 이름만 나온 신문에는 조금 섭섭한 마음이 드는 가운데 그는 방바닥에 신문을 다 펼쳐놓았다. 그리고는 자기가 한 간첩활동이 무엇인지, 조직도를 중심으로 기사를 비교검토하면서 공부하는 자세로 꼼꼼이 읽어보았다.

<글:은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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