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마이너 리그(20)

  • 입력 1998년 11월 11일 18시 59분


출분 ②

조국의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늦가을 오후 감나무잎이 떨어져 있는 마당은 고즈넉하다 못해 약간 쓸쓸했다. 군사우편 한 통이 빨랫줄에서 떨어진 흰 손수건처럼 수돗가에 날아와 있었다. 조국의 형 조선이 보낸 편지였다. 수돗가에는 또 등받이 없는 길쭉한 나무 의자와 역기가 놓여 있었고 그 옆의 벽돌담 틈으로는 작은 사각거울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우리는 번갈아가며 펌프 아래 엎드려 등목을 한 다음 장지문을 열고 어둑신한 방으로 들어갔다. 조국이 포도주가 든 2리터들이 주전자를 가져왔다. 아버지가 농협에 다니는 것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는 몰라도 그의 집에서는 깐포도 통조림을 만들고 남은 포도껍질로 몇 독씩 술을 담그곤 했다. 우리는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방해하는 시선은 아무데도 없었다. 담배를 피우고 기타도 쳤다. 다른 애들은 땀흘리며 마라톤을 하는 동안 허송세월을 택한 데 대해 후회 없음을 과시하듯 목청껏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승주는 끝내 소희가 오지 않아 상심해 있었다. 몇 번인가 나는 입을 열었지만 승주가 쳐다보는 순간 수족관의 금붕어처럼 뻐금거리다가 그냥 다물고 말았다. 술은 취하지 않고 점점 가슴만 답답해왔다.

우리는 마라톤이 끝날 시각쯤 학교로 가는 시내버스를 탔다. 그리고는 몇 정류장 앞에서 미리 내려 아직도 뛰고 있는 아이들 사이로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수상자들은 이미 한 시간 전에 교문을 통과해 들어갔을 것이다. 대세에 아무 영향도 주지 못하는 아이들이었다. 그런데도 눈이 풀린 채 기진맥진 열심히 뛰고 있었다. 젖산이 과도하게 분비되어 근육기능이 저하된 그애들을 나는 마음 속으로 아낌없이 성원했다.

“그렇지. 그렇지. 잘 한다. 새나라의 어린이는 모두모두 힘을 내야 하는 거야. 넌 할 수 있어, 무게중심을 조금 낮추고, 자, 자.”

내 옆에서 뛰고 있는 아이는 더이상 무게중심을 낮출 수 없는 우리 반 1번이었다. 키가 작아 체육시간에 뜀틀도 제대로 넘지 못했고 교련시간마다 놀림감이 되었다. 짧은 팔다리를 뻗어 총검술 16개 동작, 각개전투, 제식훈련을 하는 그애는 장난감 병정을 연상시켰던 것이다.

그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롭게 보였다. 이는 앙다물었고 짧은 다리는 부들부들 떨렸다. 입에서는 쉬파리가 끓는 듯한 거친 숨소리가 새어나왔으며 머리통 위에 손을 대보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를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는 뛰었다. 술냄새가 풍기는 입을 벌리고 조금씩 뛰는 척하면서 옆눈으로 지켜보던 나는 그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드디어 교문에 닿았을 때 하마터면 손뼉을 칠 뻔했다.

날이 완전히 저물어 운동장은 어둑어둑했다. 나는 혼자 운동장 가운데로 천천히 걸어들어갔다. 내 몸이 어둠 속에 묻혀드는 것을 느끼며 한참동안 가만히 서 있었다. 허탈하고 아니꼽고 막막하고 배고프고 싸늘하고 짜증나고 치밀고 나른하고… 내가 느끼는 그 복합적인 감정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조금 후에야 깨달았다. 그것은 자괴였다.

<글:은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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