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구름모자 벗기 게임(67)

  • 입력 1998년 10월 6일 19시 27분


제3장 나에게 생긴 일⑩

나는 부희의 집 마루에 쓰러져 누워버렸다. 제단에 올려진 피 흘리는 짐승처럼 이대로 죽어버렸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몸이 덜덜 떨리고 정신이 빠르게 혼미해졌다. 몸에 묻은 낯선 구토물 냄새가 의식이 쥐고 있는 마지막 현실 같았다. 호경 역시 내 곁에 벌렁 드러누웠다. 그리고 울기 시작했다.

―믿을 수가 없다. 너같이 아무 것도 모르는 애가… 왜 그랬어… 왜 그런 짓을 했어? 넌 그런 애가 아니었어. 대체, 정말 너를 모르겠다. 인간이 뭔지 모르겠어.

호경과 나는 동이 터 올라 공기가 희부윰해질 때까지 마루에 누워 있었다. 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방안에 내던져진 나는 다음날 하루 내내 고열에 시달리며 누워 있었다. 얼굴과 목의 피부가 벗겨져 화끈거렸다. 몸이 달구어진 쇳덩이처럼 뜨겁고 무거웠다. 호경은 서점에 나가지 않았다. 그는 수를 학교에 태워주고 돌아왔고 오후에 수를 태우러 나갔다가 돌아올 뿐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학교에 갔다온 수가 영문도 모르는 채 나의 머리맡에 앉아 엄마의 다친 얼굴과 몸을 쓰다듬으며 훌쩍거리다가 호경의 성난 음성에 불려나갔다. 집안엔 정적이 감돌았다. 호경은 한밤중에 소주병을 들고 방에 들어와 묵묵히 소주 한병을 다 비운 뒤 중얼거렸다.

―언젠가, 9월초의 일요일이었을 거야. 넌 백화점엔 간다고 차를 타고 갔지. 그런데 휴게소에 갔더니 차가 세워져 있었어. 이상한 일이다 싶어 휴게소 여자에게 물어보았지. 여자는 네가 아는 사람을 만나 그 사람 차를 타고 시내로 갔다고 했어. 의아하긴 했지만 애선을 만났나보다 생각했어. 누구를 만났는지 나중에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잊어버렸지. 또 한번은 내가 초저녁에 들어온 날이었어. 길에서 우린 마주쳤지. 나는 장난스럽게 네 차를 막아섰어. 어디 가느냐고 물으니 넌 당황한 얼굴로 케익 가루를 사러간다고 하더군. 케익 가루… 내가 집에 있다고 해도 넌 없다고 우겼어. 그래서 내 차에 옮겨 타라고 했더니 넌 꼭 네 차로 갔다 오겠다고 했지. 하는 수 없이 난 집으로 먼저 왔고 넌 갔어. 찬장문을 열어보니 아직 뜯지도 않은 케익가루 봉지가 있었어. 넌 정확하게 40분 뒤에 왔지. 케익가루 한 봉지를 달랑 들고. 난 네게 물었어. 여태 뭘 하고 오느냐고. 겨우 17분 정도면 충분했을텐테. 넌 길에서 애선을 만났다고 했던가… 네 머리카락속엔 풀잎이 묻어 있었어. 그러고 보니 그런 날은 셀 수도 없이 많았어. 일요일에 나와 수를 기어이 떼어놓고 쇼핑을 하러 가서 사온 물건이라고는 수의 바지 한 장과 두부와 토마토가 전부인 날도 있었지. 지금 생각하면 분명 정신 나간 여자 같았어. 그리고 한번은 퇴근해 오다가 길에서 네가 차를 세워놓고 공중전화를 거는 것을 본 적도 있었어. 내가 경적을 울리자 넌 황급히 전화를 끊었어. 어디다 걸었느냐니까 넌 한동안 대답을 못했지. 그리고는 동생에게 걸었다고 했어. 저녁 풍경이 너무 좋아서 시골길에서 전화를 하고 싶었다고… 이상했었어. 많은 것이 계속 이상했었어… 그런데도 이상하다고만 느꼈을 뿐, 눈꼽만큼도 의심을 하지는 않았어. 내 상상력의 부족인가…

그는 또 나를 주먹으로 치기 시작했다. 처음엔 장난처럼 그 다음엔 조금 더 강하게 그 다음엔 숨이 막히도록…

―우리 같이 죽자. 그 수 밖에는 없어.

<글:전경린>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