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구름모자 벗기 게임(49)

  • 입력 1998년 9월 13일 19시 5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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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달의 잠행 (25)

그는 최근에 이빨이 상해 상한 이빨을 혀로 훑으며 치치하는 소리를 내는 역겨운 버릇이 생겼다. 나는 치과에 가는 게 어떠냐고 물었다. 그는 일요일은 문을 닫는다고 말했다. 나는 평일에 왜 치료를 받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그는 시간이 없다고 말했다.

짜증스러워졌다. 나는 더 이상 이빨에 관해 말하지 않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으니 혼자 낚시를 가는 게 어떠냐고 물었다. 그는 싫다고 했다.

그가 입을 다물어버리자, 혼자 백화점을 간다거나 미장원 혹은 친구를 만나러 가야한다는 핑계를 대고 다른 남자를 만나러 가는 것은 모처럼의 휴일에 너무 잔인한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죄책감 때문에, 온천에서 목욕을 하고 마트에 가 필요한 것을 산 뒤에 바닷가의 횟집에서 회를 먹기로 했다.

온천에서 일부러 3시 50분에 맞추어 나왔다. 호경은 많이 기다렸기 때문에 투덜댔다.

시계를 보면서 목욕탕안에서 버티다보니 나의 손가락이 물에 불어 쪼글거렸다. 차를 타고 나가다가 나는 고갯마루에 있는 휴게소에서 커피를 한잔 마시고 가자고 가볍게 말했다.

휴게소 길가엔 빈 트레일러가 세워져 있고 승용차들이 줄을 이어 서 있었다. 일요일이라 가족 단위의 피서객이 많았다. 두 군데 등나무 아래도 비치 파라솔 아래에도 자리가 없었다. 우리는 냉방된 차안에서 커피를 마셨다.

4시 8분쯤에 규의 차가 나타났다. 그를 눈으로 보면서 만날 수 없다는 생각을 하자 엄청난 비극의 여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그는 휴게소 주위를 한바퀴 돌면서 나의 차가 있는 지 살피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휴게소 입구에 차를 세웠다. 나는 호경에게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야겠다고 말하고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차안에서 그가 볼 수 있도록 꽃이 활짝 핀 협죽도 앞을 지나 사람들 사이를 꿈속처럼 천천히 둘러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가게 안에서 창문으로 규를 관찰했다. 짙은 청색의 니트를 입은 규는 나를 보았는지 담배를 피워 물고 단정한 공무원처럼 골똘하게 앉아 이쪽을 보고 있었다. 나는 당장에 달려가 그 얼굴을 일그러지도록 두 개의 손바닥으로 누르고 싶은 욕망을 느꼈다. 아이스크림을 사 가게에서 나오자 규가 경적을 가볍게 울렸다. 그는 용의주도한 사람이었다. 나의 시선이 한순간 규를 스쳤으나 규를 보지는 않았다. 빠른 걸음으로 걸어 가 호경의 차에 올랐다. 호경은 이내 차를 출발시켰다.

집에 돌아온 건 10시경이었다. 횟집에서 맥주를 마신 탓에 바닷가의 방파제에 차를 세우고 술이 깰 때까지 시간을 보내고 돌아왔다. 돌아오면서 보니 윗집에 불이 켜져 있었다. 나는 과장되게 술에 취한 척, 몹시 피곤한 척 하며 이를 닦고 곧바로 침대로 가서 누웠다. 호경은 들어오자마자 텔레비전을 켜더니, 갯벌의 생태에 관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보기 시작했다.

‘새의 마음 같을 거야…….’ 그 말이 다정하게 내 몸속을 흘러 다녔다. 그는 내 기분을 알고 있는 것이었다. 숲속의 양치류 같이 그늘진 곳에서 무성하게 자라난 나의 음습한 기분을.

그 말은 천천히 나를 데워 결국은 뱃속이 뒤집히도록 만들었다. 한번도 상상해 보지 않은 일이었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한밤 중에 규를 만나는 일. 충동을 인내하기에는 규는 너무나 가까운 곳에 있었다.

<글:전경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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