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구름모자벗기 게임(23)

  • 입력 1998년 8월 13일 19시 30분


제1장 나에게도 아내가 있었다 (23)

그 즈음 나는 서점을 인수한 직후였는데, 인수하자마자 지역 서적 도매상이 부도를 내어 반품 문제로 긴장해 있었다.

밤늦게 지친 몸으로 돌아와 식탁에 앉을 때면, 미흔은 찌개를 데우고 밥을 푸면서 늘 들어도 비슷비슷한 내용의 이야기를 했다.

―부희는 그 남자가 밥을 대어 먹은 식당집 넷째 딸이었어. 고등학교 3학년에 다니던 초겨울에 배가 불러져서 학교에서 퇴학을 당하고 시장 거리 안쪽에 있는 살림집에 틀어박혀 지내던 중이었어.

내일도 서점주들의 대책 회의가 있다. 지금 있는 두 명의 점원으로는 잠시 몸을 뺄 틈도 없다. 매일 열 한 시 퇴근이다. 토요일과 일요일도 없는 나날이다. 이런 식으로 계속 하다가는 이내 지쳐버릴 것 같다. 마당의 연못은 언제 파나, 마당 둘레에 울타리도 빨리 만들고 잔디도 심고 싶다. 시작부터 일이 꼬이는 느낌이다. 아무래도 점원을 한 명 더 구해야 할 것 같다.

미흔은 내가 옳게 듣고 있지 않고 다른 생각을 한다는 것을 알고 가끔 말을 멈춘 채 밥알을 씹는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아직 총각인 것을 안 식당 주인 남자가 시골로 돌아갈 때 딸을 데리고 가면 어떻겠느냐고 한 거야. 부희 아버지도 홀아비였대. 부희는 엄마 없이 자랐는데, 그 위의 두 언니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가출을 해버렸다고 해. 부희는 식당일을 도와가면서 학교에 다녔는데, 아이 아버지는 그 집에 밥을 대어먹던 학생이었어. 그런데 그 대학생은 군대를 갔는지 어쨌는지 어느 날 깨끗하게 사라져 버렸고 임신을 알았을 때는 이미 늦었던 거야. 겨우 열 아홉 살이었어…. 그 애가 무엇을 알았겠어.

그 집 영감은 부희가 낳은 핏덩이가 자기 손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채고는 부희를 학대하고 자주 성적인 모욕까지 가했다. 아들에게는 쓸개도 없는 놈이라고, 며느리에게는 젖떼자 가랑이 벌린 잡년이라고 함부로 욕을 해댔다. 부희는 다음 해에 여자애 하나를 더 낳았다.

영감은 자기를 닮은 핏덩이가 여자애였기 때문에 더욱 미워했다. 부희의 남편은 해마다 농한기인 겨울이 되면 도시로 나가 막일을 하고 음력 대 보름을 지나서야 돌아왔다. 부희는 허리 펼 사이 없이 계속되던 밭일과 추수 일이 끝나고 조용한 겨울이 되면 화원에서 꽃 자르는 일을 하거나, 목재소에서 생선 담는 상자 만드는 일을 했다. 영감은 욕을 하면서도 아이들에게는 다정했고, 기력이 좋아서 농사일도 거뜬히 해냈다.

부희가 그 남자를 다시 만난 건 지난해 겨울이었다. 부희는 겨울 저녁, 목재소에서 돌아오는 길에 읍내 시장통 횟집 앞에서 옛날 남자와 마주친 것이다. 아들의 아버지였다. 13년만에 다시 만났지만, 부희는 그가 스쳐갈 때 알아보고 고개를 돌려 쳐다보았다. 부희는 죽기 전에 그 남자를 다시 만나게 해달라고 하느님께 그토록 극진하게 빌고 빌어왔기에 남자를 다시 만난 것이라고 여겼다. 그녀는 궁금한 것이 하나 있었다. ‘그는 내 몸에 일어난 일을 알았을까?’ 부희 자신도 배가 아주 불러진 뒤에야 알았기 때문이었다. 부희는 놀라 머뭇거리는 남자를 다짜고짜 끌다시피 해 시장 골목의 국수집으로 들어갔다. 부희가 묻자 남자가 고개를 떨어뜨렸다.

<글:전경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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