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봉순이 언니(72)

  • 입력 1998년 7월 16일 19시 3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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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나 그리구 학교 간다.

생각에 잠겨 있던 봉순이 언니는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들었다.

―봄 되믄 나 학교 간다구.

―오? 으응…그래 니가 정월생이니께…일곱살에 학교 가는 거지. 그래 세월이 벌써 그렇구나.

―운화초등학교라구 저 만리동 고개에 있는덴데, 교복도 있는 사립이래. 아침마다 아파트 입구까지 학교 버스가 오는데 그걸 타구 학교 간대. 교실마다 풍금이 한대씩 있구, 엄마는 안된다고, 언니 오빠 다니던 미동초등학교 보내야 한다구 했는데, 아빠가 하두 우겨서 그냥 보내는 거래. 돈두 엄청 많이 드는데…아빠는 내가 훌륭한 사람이 되려면 어렸을 때부터 고급스러운 환경에서 자라야 한다구 했대….

우리는 가겟집 앞까지 도달했다. 봉순이 언니는 내말을 듣는 둥 마는 둥, 나 역시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칠공주네 가겟집이 다가오고 있었고 거기서 우리는 이별해야 한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날 창백한 겨울 햇볕이 봉순이 언니의 흰 소복 어깨 위에서 부서지고 있었던가.

집으로 돌아가니 어머니는 통화중이었다. 아마도 모래내 이모인 것 같았다.

―그래. 또 돈 이야기지 뭐. 대체 약값 한다구 타간 돈도 벌써 얼만데. 너도 알다시피 요즘 아파트 융자금 때문에 내가 골치를 썩고 있는데 걔가 그걸 알기나 하겠니? 그저 아주머니는 자기보다 돈이 많으니까 돈이 있겠지 하는 거지. 그래, 내가 이번에는 냉정히 거절했다. 무슨 시가쪽 삼촌인가가 구로동서 보신탕 집을 하는데 거기 와서 일을 봐달라고 하는 모냥이야. 그래…나도 할만큼 했어. 자식이라도 나는 더 이상은 못해준다. 대체 지난번 집 나갔다 왔을 때 걔 수술 시켰지, 시집보냈지, 남편 약값 물어줬지…그래, 게다가 그 시집에서 고추 달린 핏줄이라고 애기를 달라는 모냥이야…그래, 그러믄 좋지. 지두 나이 창창한데, 수절을 하겠니? 나두 그렇게 이야기했는데 걔가 그 말을 듣겠니? 생각해보니 지두 에미한테 버림받구 여기까지 온 건데 생각하믄 나두 더 뭐라 말을 못하겠더라. 지맘에 그게 피멍이 들어 있을 텐데…그래, 놔둬. 도와주지 못할 바에야 모른 척하는 수밖에 더 있니? 그래 그리구 다음에 혹시 봉순이가 우리 이사간 집 전화번호 묻거든 니가 적당히 알아서 둘러대라…자꾸 와서 아쉬운 소리 하는데 안 줄 수도 없구 줄 수도 없구 나두 괴롭다 정말….

그날 툇마루에 앉아 바라보았던 마당에는 엷은 햇살이 튀어오르고 있었다. 나는 어머니의 통화내용을 한귀로 흘려들으며 봉순이 언니의 뒷모습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 툇마루에 앉아 생각해보니 봉순이 언니의 얼굴은 아주 많이 야위어 있었다.

아마도 내 평생 보아왔던 그녀의 얼굴중에서 가장 슬프고 가장 초라했던 얼굴이었을 것이다. 아마 그것이 마지막이었을 것이다. 물론 어떻게 알았는지 봉순이 언니는 그 뒤로도 가끔 우리집에 찾아오곤 했다. 하지만 그런 만남도 그런 이별도 이젠 없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벌써 어머니와의 어색한 만남을 끝내고 내 얼굴이나 보고 가겠다고 기다리고 있던 언니를 조금은 성가시고 부자연스러우며 쑥스러운 얼굴로 마주친 것이 그 이후 만남의 전부였다. 나는 그날 사실은,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아파트로 이사가기 전에, 봉순이 언니와 정말, 이별을 해버린 것이었다.

<글:공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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