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홍찬식/TV방송의 선정성

  • 입력 1998년 5월 7일 20시 05분


오는 7월부터 미국에서 판매되는 TV수상기에는 ‘V칩’이 의무적으로 부착된다. 이 칩은 폭력이나 섹스장면이 담긴 TV프로를 시청할 수 없게 만드는 장치로 V라는 영문이니셜은 ‘폭력’을 뜻하는 ‘Violence’에서 따온 것이다. 부모가 집을 비운 사이 자녀들은 이 칩 때문에 TV를 켜더라도 일정 등급 이하의 프로그램만 볼 수 있다. 청소년을 TV로부터 지켜주는 보호막인 셈이다.

▼이 칩의 도입은 미국 사회가 청소년을 유해환경으로부터 차단하는 데 얼마나 적극적인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미국 TV의 선정성 경쟁이 방치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점에 더욱 주목한다. 방송사 차원의 자율규제 기능이 한계에 도달했으므로 V칩과 같은 근원적 처방이 불가피했다는 설명이다. 국내 TV도 선정성 폭력성 문제에 관한 한 예외가 아니다.

▼엊그제 한 TV는 어느 중소기업 사장의 자살소동 장면을 내보냈다. 고속도로 한복판에서 20여분간 자살을 기도하는 광경이 생생하게 방영됐다. 우연히 촬영했다고는 하지만 인명이 오락가락하는 상황에서 ‘직업의식’에만 사로잡힌 카메라맨이나 여과없이 내보낸 방송사의 자세는 선정성 그 자체다. ‘경찰청 사람들’ ‘공개수배 사건 25시’같은 범죄재연 프로가 모방범죄를 부추긴다는 시민단체들의 항의도 날로 거세지고 있다.

▼이 프로들은 어린이들이 많이 시청하는 저녁 7시대에 방송되는 것이 많다. 맞벌이부부의 경우 부모가 귀가하기 이전이거나 주부가 식사 준비로 바쁜 시간이다. 청소년 정서에 미칠 해악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선정성은 속성상 점점 강도를 높여가게 마련이다. 보다 선정적인 내용만이 시청자의 관심을 유지시켜주기 때문이다. 우리도 V칩을 도입하든지 TV끄기운동을 벌여야 할지 모르겠다.

홍찬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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