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제천동행취재기]『김형!미안하오 우리만 왔구려』

  • 입력 1998년 3월 26일 07시 57분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이슬처럼….”

누군가 시작한 나지막한 읊조림이 이내 어깨동무 합창이 된다.

저 캠프파이어 불길에 우리의 불안 절망도 함께 타버렸으면.

악몽같았던 지난달. 말로만 듣던 정리해고. 우리 증권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2백여명을 ‘자른다’는 회사 방침. 어느날 부장인 나 김명연(가명)에게 날아온 살생부 명단. ‘맙소사, 부원 24명중 9명이나….’

골수암 홀어머니를 부양하는 양과장, 동생들 공부시킨다고 장가도 못간 오대리…. 어떻게 그들에게 ‘나가라’고 말할 것인가.

끊었던 술을 다시 댔다. 아침마다 핼쑥한 얼굴로 화장실에서 마른 토악질을 해대던 내 모습이 부하직원들에게 들키길 여러차례.

드디어 결심한 D데이. 대상자들을 한명한명 회의실로 불렀다. “미안하다”외엔 할 말이 없었다.

싸늘한 표정으로 매몰차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사람은 차라리 나았다. 그러나 “제가 못나 부장님께 심려를 끼친 것 같다”며 죄송하다고 오히려 미안해 하는 사람에겐 뭐라 말을 해야 좋을지 가슴이 미어졌다. 난폭한 세상.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설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떠난 사람은 떠난 사람. 남은 사람들이라도 마음을 추스르자며 토요일 느지막이 ‘서울’을 떠나 충북 제천 거문골 민박집에서 가진 부서 야유회. 인적없는 곳으로 가자고 수소문해 고른 곳. 서울은 개나리가 한창인데 여기선 눈발이 흩날린다. 봄이와도 봄을 느끼지 못하는 우리 마음같다.

불타는 장작옆 맨바닥에 앉아 술을 마셨다. 맥주 양주 막걸리 소주가 마구 섞였다. 가슴속 저 밑바닥에 숨어있던 절망들이 실려 나온다.

“차라리 봉급을 깎지, 왜 사람을 자릅니까” “왜 우리만 당합니까” “단지 살기 위해 버텨야 한다고 생각하니 회사가 지옥같아요” “살아남았다 해도 산 것같지 않습니다.”

다들 나만큼 아팠구나. 그래 맘껏 울자. 그러나 언제까지 눈물로만 보낼쏘냐. 헤어짐의 괴로움과 아픔을 재회의 기쁨과 즐거움으로 승화할 수 있도록 튼튼한 일터를 만들자. 서로 더 보듬어 주고 아껴주고 다독거려 가며 열심히 일하자. 그리하여 다시는 사랑하는 동료들이 하루 아침에 직장을 떠나게 하지말자.

비온뒤 땅이 굳고 긴밤 지나면 새벽이 오지 않느냐. 자, 봐라! 저기 저 멀리서 동이 터온다.

〈제천 동행취재기〓허문명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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