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窓]이현두/미움 이겨낸 큰사랑

  • 입력 1998년 2월 12일 19시 34분


화재로 소실된 약현성당
화재로 소실된 약현성당
한 부랑자의 어처구니없는 방화로 1백6년동안 곱게 지켜온 모습을 한순간에 잃어버린 서울 약현성당내 본당건물. 12일 아침 일찍부터 본당건물에 모여든 신도들은 검게 그을려버린 본당건물 안을 둘러보며 눈시울을 붉혔다. 건물 첨탑 아랫부분에 매달려 있는 종을 바라보던 신도들은 한세기동안 하루 세 차례씩 울려 퍼지던 종소리를 당분간 들을 수가 없어 안타깝다는 듯 발길을 옮기지 못했다. “그러기에 서울역 주변의 부랑자들이 성당에 들어 오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애초부터 성당에 오는 부랑자들에게 밥을 지어주지 말았어야 했는데….” 삼삼오오 건물 안을 둘러보던 일부 신도들사이에서 부랑자들에 대한 증오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오래가지 않았다. 오전 10시 본당 건물옆 순교자기념관에서 열린 미사는 신도들의 마음에서 미움을 털어냈다. “이런 일이 일어난 데에는 외부사람에 관심을 가지지 못한 우리의 책임도 크다”고 입을 연 주임신부의 강론은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증오심을 없애고 부랑자들을 더욱 사랑으로 감싸 안아야 할 것”이라는 말로 이어졌다. 미사가 끝나는 오전 11시. 김수환추기경이 직접 성당을 찾아왔다. 신도들과 함께 불탄 본당건물 안을 둘러 본 김추기경도 망연자실한 표정이었다. 아무 말도 없이 건물을 둘러본 김추기경 역시 신도들에게 일어날 수 있는 증오심을 가장 먼저 걱정한 듯 “불을 지른 사람이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신도들이 기독교에 대한 반감을 갖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김추기경이 돌아간 뒤 본당건물 안에서 화재의 상처를 씻어내는 데 팔을 걷어붙인 신도들 사이에서 증오의 목소리는 더 이상 흘러나오지 않았다. 〈이현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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