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해태이적 송구홍의 숨은 이야기]

  • 입력 1997년 12월 28일 18시 44분


지난해말 LG 최종준 단장은 두툼한 서류를 받아 들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리고 송구홍과 현대 투수 안병원의 맞트레이드를 백지화하기로 마음먹었다. PC통신에 뜬 「송구홍 트레이드 반대 상소문」에 마음이 움직였기 때문. LG 팬들의 그에 대한 사랑이 너무나 애절했던 것. 이로부터 1년후인 26일. 결국 송구홍은 해태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말았다. 이 소식에 팬들은 또 한차례 펄쩍 뛰었다. ID가 INT인 네티즌은 『송구홍이 타석에 들어서면 차라리 해태를 응원하겠다』고 할 정도. 그러나 LG는 이번에는 흔들리지 않았다. 보스턴 레드삭스로 간 이상훈의 빈 자리를 메울 투수가 너무나 절실했기 때문이다. LG 팬들은 송구홍의 몸을 아끼지 않는 플레이를 잠실에서 보고 싶어 한다. 그래서 그의 트레이드를 반대한다. 일화 한 대목. 보통 선수들은 한해에 8벌 정도의 유니폼을 지급받는다. 그러나 송구홍은 슬라이딩을 너무 많이 해 옷이 빨리 해진다. 구단은 그에게 바지만 5개를 더 주었다. 그래도 송구홍은 바지를 기워 입었다. 송구홍은 이상스럽게도 LG와는 궁합이 맞지않았다. 자신이 잘하면 팀은 바닥을 기었고 자신이 군입대나 부상으로 빠지면 팀성적은 치솟았다. 송구홍은 91년 1순위로 LG에 입단했다. 그러나 데뷔하기도 전 오른손 등 부상으로 출장 기회조차 잡지 못했다. 타율은 겨우 0.236. 근성으로 똘똘 뭉친 송구홍은 92년 다시 태어났다. 20―20클럽에 가입했고 20연속경기 안타도 기록했다. 3루수 골든글러브도 송구홍의 품에 안겼다. 93년에도 유격수와 톱타자를 맡아 타율 0.307을 기록, 팀을 3년만에 플레이오프에 진출시켰다. 갑자기 날아온 현역 입대 통지서. 그러나 몸을 사리지 않는 플레이 덕에 발목 부상이 심해져 논산훈련소에 들어가자마자 퇴소조치. 송구홍은 94년 10월 방위 판정을 받았다. 그가 빠지자 LG는 4년만에 정상에 복귀했다. 동료들이 당시 이광환 감독을 헹가래치는 것을 송구홍은 인천구장 외야 관중석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다시 돌아온 97년. 송구홍의 자리에는 「신데렐라」 신국환이 서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5월에는 타구에 맞아 오른발 발가락이 부러졌고 6월엔 형이 세상을 떠났다. 송구홍은 자신의 비운을 『재주가 너무 많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전천후 내야수」라는 별명처럼 여기저기를 옮겨 다녀 「주종목」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 그러나 그는 웃음을 잃지 않는다. 물론 좌절도 하지 않는다. 팬들은 송구홍이 LG를 떠나는 것이 못내 아쉽지만 해태에서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서리라고 믿고 있다. 〈김호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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