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佛월드컵]돌아온 고종수 「눈물의 다짐」

  • 입력 1997년 12월 25일 20시 29분


「축구 신동」 「왼발의 천재」 「럭비공」 「시한폭탄」. 그의 평가는 이렇듯 엇갈린다. 월드컵축구대표팀 최연소스타 고종수(19·삼성). 17세의 나이에 올림픽대표로 선발될 만큼 뛰어난 기량을 지닌 「축구 천재」로 평가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좀처럼 종잡을 수 없는 그의 튀는 성격 때문에 「말썽꾼」으로 악평을 하는 이도 있다. 휴대전화 문제만 해도 그렇다. 고교를 졸업하자마자 휴대전화를 구입한 뒤 늘 끼고 다니는 그를 보고 주위에서는 「건방지다」고 본 것. 그러나 고향 여수에 있는 부모의 안부를 수시로 알아보기 위해 그는 휴대전화가 꼭 필요했다. 택시운전사로 일하다 기관지천식으로 투병생활을 해오고 있는 아버지. 그리고 음식점을 운영하다 허리디스크로 몸져 누운 어머니와 하루라도 전화 통화를 하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았던 것. 이런 사정을 알 리 없는 주위의 시선은 따갑기만 했다. 요즘 선수들이 대부분 휴대전화를 지니고 다니는 것을 보면 고종수는 여기에서도 한발 앞서간 셈. 지난 1월 고종수를 월드컵대표팀에 발탁한 차범근감독은 주장이자 최고참인 최영일(31)과 한 방을 쓰게 하는 등 「고종수 길들이기」에 나섰지만 만만치가 않았다. 최영일에 이어 대표팀 「군기 반장」인 고정운(31)이 같이 방을 쓰면서 수시로 「군기」를 잡아 보았으나 허사였다. 이처럼 맘대로 안되는 고종수이지만 부모에게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효자」. 금호고 재학시절 동료선수들이 혹독한 훈련을 견디지 못하고 팀을 이탈할 때도 끝까지 버틴 것은 바로 부모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서였다. 또 고교를 졸업하고 고려대 진학이 예정돼 있었지만 하루라도 빨리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1억원의 계약금을 제공한 프로팀 삼성으로 진로를 굳힌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왼쪽 무릎 부상으로 98프랑스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에는 출전하지 못했다. 그러나 『네가 꼭 필요하다. 이번에는 제발 정신차리고 열심히 하라』는 차감독의 설득에 눈물을 흘리며 되돌아왔다. 『앞으로 튀는 행동을 하지 않고 월드컵 본선에서 맹활약해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겠다』는 그의 예사롭지 않은 다짐이다. 〈권순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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