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가 절박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외환보유고가 사실상 바닥난 가운데 외화차입 길이 막히고 만기외채 상환연장도 더욱 어려워졌다. 우리 경제의 대외신인도마저 급격히 추락하고 있다. 미국의 신용평가기관 무디스는 우리나라 신용등급을 다시 2단계 낮추었다. 또 다른 평가기관인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S&P)도 우리나라 유수 대기업들의 신용등급을 일제히 하향조정했다. 그것도 위험채권이나 투기채권 취급을 받아야 하는 정크본드 수준으로 떨어뜨렸다.
이같은 대외신인도 추락은 외환사정을 최악의 상황으로 내몰고 있다. 연말까지 갚아야 할 단기부채만 1백억달러에 이르고 있으나 가용외환보유고는 15억달러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해외에서 돈을 빌릴 길은 원천적으로 막혀 있다. 정부가 추진중인 1백억달러 외화표시채권 발행도 제대로 이루어질지 불투명하다.
하루가 다르게 보유외환이 줄어들고 한달새 국가신용등급이 4단계나 추락하다 보니 환율이 요동치는 것은 당연하다. 자유변동환율제 도입 직후 다시 오름세로 돌아선 환율은 어제 사상 처음 달러당 2천원선을 넘어섰다. 또 금리는 30%대로 치솟고 주가도 폭락세로 돌아섰다. 국제통화기금(IMF)의 긴급자금지원이 이루어지고 대통령선거가 끝나면 외환 금융위기가 한고비를 넘길 것이라던 기대가 허무하게 무너지고 있다.
국제금융가에선 한국의 모라토리엄(국가채무 지불유예)설까지 나돌고 있다. 실제 그런 상황이 현실화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외채규모가 상상을 초월하는데다 단기외채 비중이 너무 높다. 국제금융가에 알려진 한국의 외채총액은 해외법인분을 합쳐 2천6백억달러에 이르고 이중 단기외채는 1천억달러가 넘는다. 총외채규모가 당초 정부가 추정한 1천3백억달러의 두배에 이른다.
정부는 최근까지도 이를 제대로 파악조차 못하고 있었다. 뒤늦게 임창열(林昌烈)경제부총리가 김대중(金大中)대통령 당선자에게 외채규모를 2천5백억∼3천억달러로 보고했지만 그것도 추정치다. 외채총액과 당장 갚아야 할 단기외채규모가 얼마인지도 모르고 외환수급대책을 운운하며 자유변동환율제를 도입하는 만용을 저질렀다.
국가부도위기가 눈앞에 닥친 심각한 상황이다. 그러나 무슨 일이 있어도 국가파산만은 막아야 한다. 특단의 조치가 시급하다. 새로 발족한 12인 비상경제대책위원회는 무엇보다 외국투자가들이 한국을 믿도록 하는 구체적 개혁조치를 과감하게 추진할 필요가 있다. 시장경제 원칙에 충실하고 개방화에 박차를 가하는 내용의 경제정책 방향을 보다 명확하고 투명하게 보여줘야 한다.
부실금융기관과 부실기업 정리를 더 이상 미뤄서는 안된다. 은행법상의 지분한도 확대, 적대적 인수합병(M&A) 허용, 외환관리법 폐지 등도 결국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면 앞당겨 단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더욱 시급한 것은 금융외교의 강화다. IMF 세계은행(IBRD) 아시아개발은행(ADB) 등 국제금융기구, 국제적 대은행 그리고 미국 일본 등과 긴밀한 접촉을 통해 조기자금지원을 이끌어내도록 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