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아과 의사인 김영순씨(38·서울 자양동)는 특별한 약속이 없는 한 날마다 정오부터 2시까지 점심시간에 집에 간다. 집은 병원에서 걸어서 5분거리. 여섯살 네살의 형제를 둔 그에게는 아이들과 함께 점심식사를 하고 짬짬이 집안일도 챙기는 것이 일과가 됐다.
서울 대치동에서 출퇴근하던 그는 몇달전 병원옆으로 이사를 했다. 길에서 보내는 시간을 절약해 아이들과 같이 있는 시간을 늘리고 싶어서다. 그는 『아이들이 곧 학교에 들어가면 숙제와 준비물을 챙겨야 하는 등 엄마의 도움이 필요하고 집안일에도 주부의 손길이 많이 필요하기 때문에 남편과 의논해 집을 병원근처로 옮기게 됐다』고 말했다.
최근 이처럼 아내의 직장 근처로 이사가는 맞벌이 부부가 늘어나고 있다.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이 적어 아쉽기만 한 신세대 부부들. 교통체증이 심한 실정에서 두 사람중 한쪽만이라도 출퇴근 시간을 절약해 아이에게 투자하고 집안일을 돌보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서울 충정로의 한 출판사에서 일하는 김은숙씨(33)는 1년반전 양천구 신월동에서 직장 근처 아파트로 옮겼다. 변호사인 남편의 직장은 서초동. 예전에는 집에서 회사에 출퇴근하는데만 3시간이상 걸렸지만 지금은 버스 한 정거장 거리밖에 안된다. 『일하는 엄마라면 다 알거예요. 집에 1분이라도 빨리 갈 수 있는 게 얼마나 생활의 여유를 주는데요. 동네 슈퍼에 가려해도 8시면 문을 닫아 퇴근 시간마다 동동거렸지만 이제 그런 걱정이 없어요. 아이들은 같은 단지에 사는 아주머니가 돌봐주지만 그래도 갑자기 아이가 아프다든지 하는 위급한 상황이 닥쳤을때 금방 달려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심리적 안정을 주는 것 같아요』
이런 현상은 친정이나 시댁에 아이를 맡기는 사례가 줄어들고 있는 것과 연관돼 있다. 얼마남지 않은 황혼의 시간을 즐기고 싶어하는 노인들이 증가하면서 맞벌이 부부들이 양가에 신세를 지는 일이 예전처럼 여의치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요즘 산부인과 병실앞에선 아이의 할머니와 외할머니가 『아휴, 이제 애보시려면 힘드시겠어요』라는 말을 상대에게 건네며 서로 신경전을 벌인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
일산 시댁에서 서울로 출퇴근하던 취업주부 이경진씨(33)는 그동안 세살배기 아들을 돌봐주던 시어머니가 갑자기 다리를 다친 것을 계기로 직장 근처인 세검정으로 이사했다. 시어머니가 이들에게 분가를 권유한 것. 가까운 곳으로 이사간 다음 아침에도 꼬박꼬박 식사를 한 뒤 아이를 놀이방에 데려다줄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교통체증에 시달리지 않아 몸이 덜 피곤한 것도 장점. 평일 저녁에 청소나 빨래를 해치우는 대신 주말이 훨씬 넉넉해졌다는 것.
이에 대해 이화여대 이동원교수(사회학)는 『육아문제를 공적인 제도보다 혈연을 통한 사적인 네트워크로 해결해온 패턴에 변화가 생기면서 나타난 젊은 부부들의 실리적 선택』이라고 풀이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육아와 가사에 대한 책임은 여전히 주부의 몫임을 보여주는 것으로도 풀이된다.
〈고미석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