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석제의 세상읽기]빨판상어 상술

  • 입력 1997년 8월 9일 07시 48분


매달 신용카드 회사에서 보내오는 카탈로그를 유심히 본 지가 오래 됐다. 뭘 사려고 한다기보다는 그때그때의 「기술 실용 유행의 첨단」을 달리는 물건, 상술의 흐름을 파악하게 해주는 공짜 교과서니까. 살빼는 약 광고가 한참 요란할 때, 살을 안 빼면 비문명인이고 불건강하고 결코 예뻐질 수 없다는 아우성이 한창일 때, 그 우악스럽고 무시무시한 광고 사이에 살짝 고개를 내민 조그만 광고 하나가 내 눈길을 끌었다. 「살이 찌지 않아 고민인 분들에게 희소식. 이 약은 확실하게 살이 찌게 해드립니다」. 그 광고를 보면서 나는 언젠가 TV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본 빨판상어를 연상했다. 거대한 가오리의 배에 빨판을 대고 찰싹 달라붙어 가오리에 생기는 찌꺼기를 얻어먹고 사는 물고기가 빨파상어였다. 이름을 보면 상어 같지만 바다의 갱스터인 상어와는 거리가 멀다. 이 빨판상어의 생태와 비슷한 상술에 「파일럿피시 마케팅」이라는 게 있다고 한다. 대기업의 대형매장 근처를 따라다니면서 매장을 열어 거대 매장에서 나온 고객을 흡수하는 상술이다. 대형 매장의 번잡스러움과 개인적인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는 스테레오 타입을 싫어하는 고객이 공략 대상이다. 파일럿피시는 상어를 졸졸 따라다니며 상어가 남기는 먹이찌꺼기를 먹고 사는 물고기다. 물론 천년만년 따라다녀도 상어가 될 수는 없다. 털에 관한 한 「가오리」 내지는 「상어」에 해당하는 것이 대머리 발모제나 가발. 그런데 노출의 계절, 여름이 되자 털 제거에 관한 광고가 다수를 차지하면서 발모제가 셋방살이 신세가 되고 말았다. 면도기 제모 크림 초음파 털제거기… 종류도 많고 보장도 약속도 많다. 그러다가 특이한 광고 하나가 눈길을 끌었다. 놀랍게도 그 제품은 「…모근에 작용, 통증없이 영구적으로 털을 제거한다」는 것이다. 한번 사서 영구적으로 특정부위의 털을 제거하고 나면 그 기계는 또 어디다 쓴담? 개인적으로 은밀하게 주문 배수하신 고객께서 그 기계를 쓰시고 나서 다른 사람 쓰라고 주기도 뭐하고 유산으로 물려줄 수도 없을 텐데. 삶의 신성한 반복성, 가변성마저 영구성을 내세운 상술로 잡아먹고 나면, 혹 저 자신을 잡아먹은 꼴은 되지 않을까. 성석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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