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을 말할 때마다 곧잘 인용되는 명구(名句)가 있다. 「사람에게 눈이 필요한 것처럼 사회는 뉴스를 필요로 한다」는 영국 작가 레베카 웨스트의 말이다. 사회가 요구하는 뉴스를 쫓아 밤에도 눈을 제대로 붙이지 못하는 직업이 신문기자다. 뉴스가 있는 곳에는 신문기자가 있다. 신문기자는 뉴스를 찾아 때로는 단 하나뿐인 목숨까지 버린다. 마치 뉴스라는 빛에 눈 먼 부나방처럼.
▼지난 5일 중국 길림성 훈춘시 남방 75㎞지점 두만강 北―中(북―중) 접경지역에서 교통사고로 숨진 본사 신동아부 李起赫(이기혁)기자도 뉴스와 생명을 맞바꾼 안타까운 경우다. 올해 나이 34세, 두만강너머 참상속에 방치된 북한동포의 가쁜 숨결을 조금이라도 가까운 곳에서 취재하겠다는 일념으로 인적 드문 두만강 끝자락까지 다가갔다가 귀로에 불의의 사고로 순직한 것이다.
▼이기자가 숨진 곳이 우리 언론사상 최초의 순직기자인 張德俊(장덕준)기자가 행방불명된 바로 그 지역 부근이었다는 것도 기연이다. 1920년 11월 당시 본사 통신부장 겸 조사부장 장덕준씨는 일군(日軍)의 북간도일대 한인동포 무차별 학살을 취재하던중 훈춘 부근 일군 작전지역에 들어갔다가 실종됐다. 본지가 창간한 해이자 「제사문제를 재론하노라」라는 사설로 일제로부터 제1차 무기정간을 당한 시점이었다.
▼이기자의 순직으로 본사는 4명의 기자를 해외취재중 잃었다. 1966년에는 白光男(백광남)기자가 월남전 종군취재중 베트콩 출몰지구에서 교통사고로 숨졌고 1983년에는 李重鉉(이중현)기자가 全斗煥(전두환)전대통령 서남아순방 수행취재중 버마 아웅산 폭발사고로 순직했다. 모두 30대 초반, 「현장」에 서지 않고는 마음을 놓을 수 없는 피끓는 나이였다. 그 투철한 기자정신의 산화가 애석하다. 이기혁기자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