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수필]김영련/고향의 여름밤

  • 입력 1997년 6월 21일 08시 13분


손톱에 봉숭아 꽃물을 들일 여름만 되면 끝없는 그리움으로 고향을 생각한다. 우리집 감나무 사이로 유자빛 노을이 장엄하게 지는 저녁이면 상긋한 미나리밭에서는 소나기 소리같은 개구리의 합창소리에 실려 오이 호박 수세미 쑥갓 냄새가 향긋하게 풍겨왔다. 작은 텃밭에는 보라색의 예쁜 도라지꽃과 소금을 뿌려 놓은듯 하얀 메밀꽃이 흐드러지게 피었었다. 흙냄새 물씬 나는 넓은 마당에서 떡갈나무 달개비 칡 약쑥들이 타는 알싸한 향은 참으로 그윽하고 좋았다. 꽃무늬 그려진 절편같은 반달이 우물속의 두레박에 비치면 어머니는 앞마당에 멍석을 펴고 은하수 건너 달나라의 옥토끼가 계수나무 아래서 방아찧는 이야기랑 금방망이 든 도깨비가 나오는 옛 얘기들을 밤새도록 들려주셨다. 그림같은 여름밤은 깊어만 가고 아릿한 연기향이 온집안에 퍼지며 풀벌레소리가 정적을 지킬때면 혼자 타던 모깃불의 연기도 차츰 가늘어지고 호박꽃 초롱에 반딧불 넣고 놀던 아이들도 홑이불속에서 잠이 들었다. 밤하늘의 보석 같은 수많은 별들은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았고 무섭도록 눈부신 호박꽃과 함께 푸른 박이 열려있는 초가지붕 위로 하얀 달빛만이 대추나무 사이로 폭포수처럼 부서지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은 수정같이 맑은 냇가의 물처럼, 옥수수대에 사각거리던 바람처럼 하염없이 흘러만 갔다. 밤하늘의 별처럼 그토록 아름다웠던 고향의 여름밤은 이제는 신화가 되어 마음속의 보물로만 남아있다. 옛날 마당에 핀 모깃불의 연기처럼, 소나기 그친 뒤 나타났다 사라지는 고운 무지개처럼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버드나무가 하늘을 뒤덮은 속에 자유롭게 맴 도는 수천마리의 잠자리떼, 탱자 열매가 희망처럼 노랗게 익어가고 석류꽃이 툭하고 떨어지는 대낮 어디선가 낮닭 우는 소리, 구수한 소여물 냄새에 섞여 매미 여치 소리가 들려오는 한여름의 고향 풍경은 꿈처럼 아득하기만 하다. 오로지 정직과 성실로 땅을 사랑하며 사신 아버지와 새참을 머리에 이고 논둑길을 걸으시던 어머니의 모습도 이제는 볼 수가 없으니…. 고향은 어디인가. 김영련(부산 해운대구 반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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