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 가능성이 아주 조금만 보여도 고향에 공장을 세우겠다고 생각해왔습니다. 돌아가신 부모님께 효도를 못다한 아쉬움 때문에 늦기 전에 뭔가 보답해야 한다는 절박감에 늘 쫓겨왔지요』
침대 합작공장 건설을 위해 3일 방북한 에이스침대 安有洙(안유수·63)회장은 출국에 앞서 본보 기자에게 『지난 수개월간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고 털어놓았다.
고향인 황해도 사리원에 세울 침대공장을 꿈꾸며 북한당국을 설득하기 2년여. 합작추진 상대인 조선오륙무역회사와 의향서를 교환하고 손꼽아 기다리던 방북초청장과 신변보호보장서를 손에 쥔 뒤엔 고향에 남아있는 형제들이 자꾸 머리에 떠올라 평소 꼼꼼히 챙기던 업무마저 거의 손에 잡히지 않을 정도였다.
『굶주리는 북한 땅에서 무슨 침대냐고 얘기들 할 겁니다. 그러나 북한은 필연적으로 개방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북한이 조만간 금강산을 관광지구로 개발한다치면 최소한 3천대 정도의 침대는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중국시장에 대한 기대도 그의 북한진출 의욕을 키웠다.
안회장은 중국에 먼저 진출, 중국 광주에 공장을 만들고 상해 북경 심양엔 판매사무소를 열었다. 그렇지만 한 공장에서 하루 7백여대씩 만들어내는 침대로 중국전역의 수요를 충당하기엔 무리여서 북한사업을 구상하게 된 것.
질좋은 북한산 원목으로 침대와 가구를 만들면 동북3성과 러시아 동부에까지 쉽게 판로를 넓힐 수 있으리라는 복안이다. 안회장이 북한사업을 낙관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온돌 위주였던 60년대 초 주위의 비웃음에 아랑곳하지 않고 침대업체를 세웠던 열정과도 무관하지 않다. 그는 60년대 초 부산에서 했던 군납 일을 그만 두고 서울로 올라와 인사동에서 방송기자재를 납품하다가 우연히 침대를 알게 됐다.
『미8군에서 흘러나온 외국잡지엔 유달리 침대 기사와 광고가 많았습니다. 「바로 이거다」 했죠. 먹고 살기 바쁜 시절이었지만 언젠가는 침대문화가 자리잡을 것으로 확신했습니다』
에이스침대의 전신인 에이스침대공업사는 63년 9월 이렇게 태어났다.
그러나 에이스는 10년동안 세번이나 문을 닫았다. 한국 최초의 국산침대 제작공정은 「원시적」이었다. 스프링도 손으로 만들고 열처리도 불을 때서 했다. 품질은 그런대로 괜찮았는데 판매가 문제였다. 보릿고개가 해마다 찾아오던 시절, 그나마 돈좀 있는 사람은 미군 중고침대만 찾았다.
70년대 반포에 아파트가 들어선 뒤에야 에이스는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강남 개발붐을 타고 에이스는 중견기업으로 떠올랐다.
『침대는 사람이 직접 사용하는 것인 만큼 과학적으로 만들지 않으면 편안한 수면은커녕 건강을 해칩니다』
「침대는 가구가 아니라 과학」이라는 광고카피를 스스로 만들어낸 그의 경영지론이 지금 이 회사를 국내 부동의 1등 침대회사로 올려놓았다.
그리고 망향의 열정이 사리원 침대공장 건설의 꿈을 익혀가는 원동력이 되었다.
북한당국이 휴전선에 가까운 사리원에 대남 합작 사업을 유치하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로 안회장의 「고향 공장」에의 집념이 크게 작용했다. 북한은 지난 95년 대우 남포공장 허가 이후 나진 선봉 경제특구 외에는 대남 합영(합작)을 극력 피해온 터였다.
안회장은 16세때 전쟁을 만났다. 부모가 나중에 서울에서 만나자며 막내아들인 그를 서울행 목탄열차에 태워보낸 것이 부모와의 영원한 이별이었다.
〈박내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