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책]「느티나무 사랑」/문순태 지음

  • 입력 1997년 4월 29일 09시 03분


열두살 때 삶과 죽음의 신비로운 경계는 없음을 깨달은 빈한한 소년. 전란으로 사람과 집과 꽃들이 쑥밭으로 변한 고향의 황량함이 그 영혼을 도려냈다. 그가 중년이 된 후에는 광주를 온통 부음의 도시로 만든 오월의 참극이 남은 영혼마저 부장(副葬)시켰다. 세월이 흐른 후 그를 더욱 배회하게 만든 것은 그 죽음과 역사의 의미를 기억 저편으로 이장(移葬)하려는 「세속」의 편의주의. 이때 실의한 그 사내는 무엇을 해야 하나. 중진작가 문순태가 10년 침묵 끝에 펴낸 「느티나무 사랑」은 천직 목회자의 길을 등지고 전남 담양 거북재마을로 귀향한 한 사내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거북재는 작가의 실제 고향. 그곳 언저리에는 수백년 된 느티나무 한그루가 마을 지붕들을 굽어보고 있다. 봄이면 송홧가루에 휘감기며 설토화 광대나물꽃 옥란 목련과 어울려 사는 마을의 「토템」 나무. 사내 박지수는 그 나무 앞에서 상처 입은 마을의 세월을 회상하고 황량한 역사에 생명의 물길이 감돌게 해달라고 기원한다. 소설의 다른 축으로는 박지수와 헤어진 아내의 불륜과 정신세계, 어린 아들의 무의식에 유전되는 역사의 상흔이 펼쳐진다. 항상 고립감을 느끼며 창작할 수밖에 없는 지방 문인들의 글쓰기가 어떤 때 진가를 발휘하는가를 보여준다. 애향과 독특한 토속미가 담겨 있는 글이다. 그러나 작가는 주인공이 시골에 들어가 흙과 함께 하는 삶의 고양(高揚)과 기쁨을 외부인의 시선으로 보는 자세를 지킨다. 해체된 가족과 파란 많은 고향의 역사가 만나는 이음매가 불안정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문순태 지음(열림원 6,500원) 〈권기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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