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 가부장제(家父長制)가 철저히 자리를 잡은 때는 대체로 조선조 후기쯤으로 보는 학자들이 많다. 17세기 중엽에 이르면 데릴사위제나 외손봉사(奉祀)제, 여자호주(戶主)제, 남녀 공동상속제 등이 거의 자취를 감춘 것으로 나타난다. 조선조 건국초부터 강요되던 성차별적 유교이념이 일반에 완전히 뿌리를 내림에 따라 아버지는 명실상부한 권위의 상징이 된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아버지의 위상은 또한번 크게 변해 있다. 막 30대에 들어서는 가수 신해철은 「아버지와 나」라는 노래에서 「…이젠 더 이상 그를 두려워하지 않는 아내와 다 커버린 자식들 앞에서 무너져가는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한 남은 방법이란 침묵뿐」이라며 허물어져 가는 아버지의 권위를 안타까운 음률로 엮는다. 지난 6개월 동안 베스트셀러인 김정현의 「아버지」라는 소설 역시 아내와 자식들로부터 소외당한 50대 가장의 초라한 모습을 그리고 있다
▼「명퇴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는 요즈음은 어딜가나 「고개 숙인 아버지」들이 화제다. 서울의 어느 동네 산에는 아침이면 산자락에서 옷갈아 입는 중년이나 초로의 아버지들을 쉽게 볼 수 있다고 한다. 출근하듯 양복을 입고 집을 나와 등산복으로 다시 갈아 입는다고 한다. 오죽하면 남편 기(氣)살리기 운동까지 벌어질까. 끝없이 추락하는 오늘의 아버지들 모습이 안쓰럽다
▼그래서인지 신임 高建(고건)국무총리의 아버지 高亨坤(고형곤)옹의 이야기가 남다르게 들린다. 구순의 나이인데도 아들이 「남의 돈을 받지 말라, 누구의 사람이라는 말을 듣지 않도록하라, 과음하지 말라」는 자신의 가르침을 명심하고 있는지 꼿꼿이 고개를 들어 지켜보고 있는 모습이다. 시대가 바뀜에 따라 아버지의 역할이나 영향력도 달라지게 마련이다. 그렇다고 아버지라는 본래의 자리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 자리는 항상 그대로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