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정치 9단의 가문」

  • 입력 1997년 2월 17일 20시 15분


경위와 진상이야 어떻든 대통령의 아들 金賢哲(김현철)씨 한 사람 때문에 온나라가 시끄럽고 그렇지 않아도 고달픈 민생에 주름살을 더하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세계화시대를 무색케하는 국제적 수치요, 도저히 감내하기 힘든 국민적 수모다. 망명객 黃長燁(황장엽)이 언급했다는 「봉건체제」라면 또 모른다. 이 지구상 어느 개명(開明)한 민주국가에서, 「시민민주주의의 구현」을 갈망하며 「문민정부」 구호를 철석같이 믿고 정권을 맡긴 어느 나라에서 이처럼 허망한 배신적 상황이 벌어질 수 있는가. ▼ 변죽만 울린 한보수사 ▼ 시야를 넓게 돌릴 일도 아니다. 봉건시대와 식민시대를 끝내고 우리가 「민주공화정」을 도입한 이래, 대통령제든 내각제든 국정운영 최고책임자의 아들이 아버지 임기내내 끊임없이 물의의 장본인이 된 예는 일찍이 없었다. 그 「악명」 높았던 全斗煥(전두환)정권시절에도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었다. 김씨는 엊그제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증거가 나타난다면 어떤 처벌도 감수하겠다』며 억울해 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의 얘기는 진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그건 부차적 문제다. 지금 들끓는 민심을 이미 불신의 대상이 된지 오래인 검사 몇명과 법조문 몇줄로 가라앉힐 수 없음을 언필칭 「정치9단」 가문이라면 아버지든 아들이든 모를 리 없다. 그리고 한 나라의 국정을 책임진 사람으로서 당연히 갖추어야 할 「열린 귀」를 가지고 있다면 지금 왜 민심이 들끓는가도 모를 리 없을 터이다. 더 안타깝고 불행한 일은 이 모두 부질없는 기대임이 갈수록 분명해지는 현실이다. 누가 보아도 변죽만 건드리다 한보수사를 마친 채 『고소인자격 소환』이니 『증거를 대라』느니 하며 기자들과 「재치문답」을 하고 앉아있는 검찰의 모습은 한마디로 「소극(笑劇)」이다. 그래서 거의 모든 신문의 논객들도 검찰을 논외(論外)로 돌려놓은지 이미 오래다. 세상이치를 알 만큼 아는 논객들은 벌써부터 대통령 부자를 향해 해결의 열쇠를 구했다. 더 덧붙일 말이 없을 만큼 모든 논리 이유 명분을 동원하며 어떻게 해서든 대통령 부자의 마음을 움직여보려는 이들의 주장은 설득이 아니라 차라리 눈물겨운 「애소(哀訴)」에 가까웠다. 그러나 되돌아온 답은 엄중한 「경고」였다. 김씨는 결백을 주장하면서 『언론의 상업주의 때문에 우리사회의 불신풍조가 증폭됐다. 보수를 가장한 수구 언론에 대해 분명히 경고한다』고 했다. 김씨의 얘기대로 언론이라고 해서 「망동(妄動)」의 책임을 피할 수는 없다. 하지만 김씨의 얘기는 오히려 현사태의 연원과 본질을 더 또렷하게 와닿게 하는 「절망적 역설(逆說)」로 들릴 뿐이다. ▼ 民意의 심판대에 서야 ▼ 이럴 수는 없다. 나라를 생각하는 충심(忠心), 아니 최소한 일요일마다 십자상 앞에서 두손을 모으는 충심(衷心)이 있다면 이래서는 안된다. 지금처럼 개명한 세상에 천재(天災)에까지 책임을 지라는 식의 봉건적 주장을 늘어놓자는 게 아니다. 그런 자리에 있으면 이처럼 민의가 어지러운 세상에서는 설사 아무 죄가 없어도 민의 앞에 조용히 고개 숙일 줄 아는, 그리고 누구보다 겸허한 자세로 민의의 심판대에 서겠다는 결의를 보이는 처신도 배워야 한다. 그것이 이른바 「정치9단」 가문의 이름을 부끄럽지 않게 하는 처신이자 대통령 아들로서 마땅히 갖추어야 할 도리다. 이도성 <정치부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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