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188)

  • 입력 1996년 10월 18일 09시 03분


불행한 채로 행복하게 살기〈36〉 상현은 계속 인도풍으로 분위기를 잡았다. 『아주 가는 건 아니야. 떠나면 돌아오기도 하는 것이고, 흐르다 보면 또 제자리 로 돌아오는 게 인생이니까. 돌아올 때쯤이면…… 내 인생도 가벼워져 있겠지. 그리 고 네 인생도……』 그러고는 내 어깨를 잡으며 천천히 말했다. 『네가 죄가 많아서 내가 고생이다. 괜찮아. 다 업보겠지』 그의 인생이 가벼워지든 무거워지든 관심이 없었다.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아이 였다. 아이를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내가 전세금 운운하는 상현의 말에 전혀 움 직이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이를 만나기 위한 준비로서 나는 한동안 그만두었던 원고 교정일을 다시 하기로 했다. 전에 교정일을 주선해 주었던 대학동창에게 전화를 걸어보았다. 그녀는 주로 전집을 펴내는 출판사로 옮겨서 과장이 되어 있었다. 그녀를 만나기 위해 어느 비 오는 토요일 나는 종로로 나갔다. 그곳에서 상현이 나와 내연관계라고 억지를 부리곤 하는 그 선배를 만나지 않았다 면 어쩌면 나는 이혼은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부업을 얻기 위해 출 판사의 친구를 만나야 했고, 그 선배는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그 출판사의 전집을 팔고 있었으며, 같은 시간에 용건을 마친 우리가 동문임을 알고 있는 친구 앞에서 굳이 나란히 그 출판사의 문을 열고 나오지 않을 이유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임신한 여자가 자주 화장실을 찾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출판사를 나오자마자 나는 오줌이 마려웠다. 선배가 상현의 안부를 묻는 것을 건 성으로 들으며 아랫배에 힘을 주고 있었다. 골목이 구부러지는 데서부터 나는 화장 실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비까지 오기 때문에 적당한 장소를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 나는 우산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식은땀이 났다. 아무리 둘러봐도 화장실이 있을 만한 건물이나 찻집 같은 곳은 눈에 띄지 않았다. 겨우 있다는 간판이 여관이었다. 그런데 여관의 간판을 본 순간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되었다. 어리둥절해하는 선배에게 잠깐만요, 하고 말한 다음 나는 다짜고짜 여관으로 뛰어들어갔다. <글: 은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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