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무지개 좇아 노 저어 항저우까지 온 소녀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8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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女 유일 亞게임 카누 도전 이예린, 경주 보러 갔다 쌍무지개 본 중1
“카약은 내 운명” 선수 생활 시작… 쌍무지개 또 만난 팔렘방선 우승
용선 매력에 빠져 카누로 갈아타
“세 번째는 항저우 하늘서 봤으면”

여자 카누 국가대표 이예린이 9일 강원 화천군 북한강훈련장에서 카누 스프린트 배를 어깨에 올린 채 카메라 앞에 섰다. 
웨이트트레이닝을 열심히 해 국가대표 동료들 사이에서 ‘몸짱’으로 불리는 이예린은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한국 여자 카누 역사상 첫 
메달에 도전한다. 화천=강동웅 기자 leper@donga.com
여자 카누 국가대표 이예린이 9일 강원 화천군 북한강훈련장에서 카누 스프린트 배를 어깨에 올린 채 카메라 앞에 섰다. 웨이트트레이닝을 열심히 해 국가대표 동료들 사이에서 ‘몸짱’으로 불리는 이예린은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한국 여자 카누 역사상 첫 메달에 도전한다. 화천=강동웅 기자 leper@donga.com
모든 게 쌍무지개 때문이었다. 아니, 쌍무지개 덕분이었는지도 모른다. 카누 국가대표 이예린(24·구리시청)은 경기 남양주시 덕소중 1학년이던 2012년 특별활동 시간에 카약 동영상을 본 뒤 매력에 푹 빠졌다. 그해 9월 1일에는 경주를 ‘직관’하고 싶어 어머니와 함께 경기 하남시 미사조정경기장까지 찾아갔다. 그런데 주말(토요일)이라 경주가 없었다. 하릴없이 벤치에 앉아 있는데 누군가 “경주 보러 왔니?”라고 물었다. 고개를 들어 대답하려는 순간 하늘에 뜬 두 겹의 무지개가 눈에 들어왔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쌍무지개였다.

9일 강원 화천군 북한강훈련장에서 만난 이예린은 “그 순간 ‘카약이 내 운명인가 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에게 말을 걸었던 이는 심영애 당시 구리여중 코치(44)였다. 이예린은 구리여중으로 학교를 옮긴 뒤 카약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이예린의 눈앞에 두 번째 쌍무지개가 나타난 건 2018년 8월 25일 인도네시아 팔렘방에서였다. 이예린은 드래건보트(용선) 남북단일팀 멤버로 이해 열린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 출전했다. 500m 결선을 하루 앞두고 동료 선수들과 훈련하다 무심코 올려다본 하늘에 쌍무지개가 떠 있었다. 용선 남북단일팀은 우승을 차지했다. 남북단일팀이 종합 국제대회에서 금메달을 딴 건 이때가 처음이었다.

아시안게임 용선 종목 출전은 카약 선수이던 이예린이 카누 선수로 바뀌는 계기가 됐다. 중국 전통 뱃놀이에서 유래한 용선은 단체종목으로 배를 저을 때 쓰는 노(패들) 한쪽에만 주걱 모양 물갈퀴가 달려 있다. 카약은 주걱 모양 물갈퀴가 패들 양쪽에 있고, 카누는 용선처럼 한쪽에만 있다. 이예린은 “순전히 호기심 때문에 용선 대표팀에 지원했다. 용선을 직접 경험해 보니 한 날 패들링이 생각보다 재미있었다”고 했다.

카약은 엉덩이를 배 바닥에 붙이고 앉은 채로 좌우를 번갈아 가며 노를 젓는다. 카누는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중심을 잡아가며 한쪽으로만 패들링을 한다. 이런 차이 때문에 카약에 비해 카누가 체력 소모가 더 많다. 유럽이나 중앙아시아 선수들에 비해 체격이 상대적으로 작은 한국 여자 선수들이 카누 종목을 잘 선택하지 않는 이유다. 9월 개막하는 항저우 아시안게임 카누 종목에 출전한 한국 여자 선수는 이예린이 유일하다.

이예린은 “카누로 종목을 바꾸겠다고 하니까 다들 나보고 ‘미쳤다’고 하더라. ‘카약을 계속해야 안정적으로 돈을 벌 수 있다’는 얘기도 들었다”며 “남들이 ‘하지 말라’고 하니 카누를 더 잘해서 ‘내 생각이 옳았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다. 힘들 때마다 쌍무지개를 봤던 기억을 떠올리며 ‘이 길이 맞다’는 확신을 되새기곤 한다”고 말했다.

이예린은 “카약을 탈 때 혼자 훈련하고 있는 카누 선수를 보면 ‘쟤는 동료들과 경쟁할 필요도 없고 편하겠다’는 생각에 부럽기도 했다”며 “그런데 막상 내가 카누 선수가 돼 혼자 해보니 이게 더 힘든 것 같다. 나 자신과 싸워야 하는데 자꾸 편하게 가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래서 이제는 여럿이 경쟁하는 카약 선수들을 보면서 각오를 다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예린은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카누 스프린트 200m 시상대에 오르는 게 목표다. 이예린이 항저우에서 메달을 따면 한국 여자 카누 첫 아시안게임 메달이 된다. 이예린은 “내가 잘해야 카누 선수를 꿈꾸는 후배들에게 용기를 줄 수 있다는 생각에 책임감도 많이 느낀다”며 “이번 아시안게임 때도 하늘을 자주 보겠다. 혹시 아나. 세 번째 쌍무지개를 항저우에서 발견할지…”라며 웃었다.



화천=강동웅 기자 leper@donga.com
#카누#이예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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